진실에 산다
가훈을 주신 아버님 내력(박철희 씀)
역관 후손 칠갑산 정기 받은 백호(白虎)
1902년 : 충남 청양군 진평면 적곡리 북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순흥인 안석호(安奭鎬, 1874 ~ 1948)와 어머니 경주이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아명 임룡(壬龍). 호 흰돌. 필명 금원(琴園), 별명 청년기 ‘아씨선생’, 중년기 ‘팔방미인’, 장년기 ‘아버지’ 였다. 자녀로는 장남 광식(31년 공주) 둘째 효식(35년 공주), 셋째 창식(43년 서울), 넷째 성식(48년 서울), 딸 문식(51년 부산) 5남매가 모두 대학을 나왔다.
조부는 역과(譯科) 오위장(五衛將) 성재(星齋) 안재건(安載健, 1838무술생)이요, 생가 조부는 관상감판관(觀象監判官) 안재부(安載富)이다. 고조부 청학(淸學)전공 사역원판관(司譯院判官) 안승엽(安承燁)은 외국어의 번역, 통역, 교육을 담당했다.

안신영의 출생 비화
“나는 1902(壬寅)년 음 정월 임인(壬寅)이요, 날자는 29일이 경인(庚寅)이요, 새벽 인시(寅時)라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었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해, 달, 날, 때가 모두 ‘호랑이’라는 것이다. 사주(四柱)를 믿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는 것뿐이다”.
“정산의 유명한 칠갑산(七甲山)이 우리 집 뒷산이다.
내가 출생할 당시 칠갑산에는 호랑이가 가끔 나타났다고 한다.
호랑이는 명물이라고 했다.
나는 칠갑산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해서, 더구나 사주가 호랑이라 호랑이와 인연이 깊었나보다”.
“커서 나의 체격, 체질, 체구가 사나운 호랑이가 될 가망은 없게 되었고 기질만은 호랑이가 됨직 했는데. 모르겠다. 영민한 호랑이가 되었는지…”
정산 북실은 지금 충남 청양군 장평면 적곡리 이다.[진실에 산다]
가훈과 선생님들의 가르침 따라 자훈 만들어
1908. 6세 : 공주영명학교 소학과 입학하였다.
1910. 8세 :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었을 때 수업시간의 심근을 찔렀던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회상한다.

김관회 선생 영향으로 독립사상 받아
“내가 여덟 살 때에 우리나라가 일본과 합방이 되어 김관회 선생님의 격려를 받고 나는 육군대장이 되어가지고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이 맹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독립사상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왔다.”[진실에 산다].
1912. 10세 : 공주사립영명학교 고등과에 입학한다.
1913년 이후 : 어느 때부터인가 좌우명을 가슴에 품었다.

한마디로 나의 자훈 곧 자기교훈을 말한다면 “진실에 산다”이다. “진실에 살자”가 아니요 “진실에 산다”란 말이다. 먼저 말은 권장이요 계획이요 희망이요 미래다. 나중 말은 고백이요 현실이요 실천이요 현재다. “우리 진실에 살자”가 아니요 “나는 진실에 산다”이다.
“진실”에는 온갖 아름다운 덕이 내포되어 있다.[진실에 산다].
1916. 14세 : 공주영명학교 8년 수업 후에 서울 배재학당 본과 2학년 편입학하였다.

주시경을 따라 한글 연구, 평생 과제로
1918. 16세 : 서울 배재학당 본과 졸업. 한글 공부는 주시경을 따라 배재에서부터라고 자서전에 전한다.
1927년부터 공주사립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할 즈음 공주에서 ‘한글연구회 조직’하였다.
이것은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공포 이전의 일이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은 공포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언어도 많이 변화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그대로 쓸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1970년부터 본격적인 한글맞춤법 검토에 들어가 약 17년에 걸친 작업 끝에 한글맞춤법통일안 가운데 불필요한 규정을 삭제하고 미비한 규정은 보완하며 현실에 뒤떨어진 규정은 일부 바꿔, 1988년 1월 19일 한글맞춤법을 고시,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1989년 3월부터 시행하였다.

안신영의 선구적 한글연구는 정부안보다 30년 전 1960년에 이미 『한글맞춤법비결』을 저작하였으니 진정한 ‘한글학자’이다.

“나 혼자서 일생을 두고 연구 공부한 것이 한글이다. 주시경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1928년 ‘백웅’ 잡지 창간도 그 결과인 셈이다.



옥살이 두 번에 애국심은 더욱 굳어져
1919. 17세 : 서울 3·1만세시위 참가하였다. (형 사영, 기영 동참)
1919. 17세 :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입학, 4월 7일 기영 형과 헌병대로 끌려갔다.
‘독립만세 부른 것이 잘못되었다’라고 자백하란다. 기영 형은 큰형이 재직한 신흥무관학교 간다고 사전 약속 때문에 거짓 자백하고 곤장 30대로 석방되었다. 나는 끝까지 버티다가 미결수 4개월, 기결수 6개월 감옥살이로 연희전문 수업연한만 길어졌다.

1937. 35세 : 평양경찰서는 안신영을 공주사립영명학교에서 조선어와 조선노래를 가르친 것을 트집 잡아서 ‘조선어 교재 발간’ 등을 출판법위반으로 옭아 넣어서 평양감옥에서 옥살이 하였다.

국가보훈처 [건국훈장 애족장 (2006)] 추서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하고 학교 졸업 후 평양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체포되어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안신영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대한문(大漢門) 등지에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 1919년 8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3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 1935년 4월 평양(平壤)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正義女子高等普通學校) 교사로서 창가집 및 한글독본을 출판하여 민족교육을 하였다. 이로 인해 안신영은 다시 체포되어 1938년 7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3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셋 셋 생활 원칙과 다양성 교육
1923. 21세 :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졸업하였다.
나는 셋을 좋아한다. 그래서 일찍이 나의 생활원칙 셋 셋을 세워놓고 살았다.

셋 셋 생활 원칙

1. 첫째 셋
① 사람을 대하여 (대인 對人)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 대한다.
② 일을 대하여 (대사 對事)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대한다.
③ 물건을 대하여 (대물 對物)
모든 물건을 하나님의 소유로 대한다.

2. 둘째 셋
① 바르게 산다
검은 것을 희다 아니하고 흰 것을 검다 아니한다.
이해(利害)관계를 앞세우지 않아야 바르게 살 수 있다.
② 부지런하게 산다.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면 성공은 따른다.
게으름은 악과 실패의 근원이다.
③ 검소하게 산다.
맑은 양심과 맑은 생각은 검소에서 출발한다.
모든 죄악은 검소를 떠난 사치에서 출발하는데 사치는 욕심을 낳기 때문이다.

3. 셋째 셋
① 약속을 지킨다.
시간, 금전, 사물에 대한 약속을 지킨다.
약속 엄수는 습관으로 길러지는 것이요 인격도야의 최고수단이다.
② 봉사하는 생활을 즐긴다.
봉사는 기쁨과 행복을 가져온다.
사람은 봉사하러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봉사 없는 곳에 햇빛은 없다.
③ 웃으며 산다.
웃으며 사는 곳에 사랑이 있다.
찡그리는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웃으신다. [진실에 산다]
1923년 공주사립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과, 역사과를 담당하였다.
학창시절에 아버지(안석호)와 자형(윤성렬)의 근무지요, 그리고 형 둘과 제씨와 자신의 모교, 특히 애국사상을 심어주신 선생님들(김관회 외)이 그리워서 공주영명학교를 택한 셈이다. 또한 농촌계몽에도 뜻이 있었다.

영명학교는 남·녀학교가 별개로 운영되었지만 운동회는 산성공원에서 합동으로 열었다. 당시 운동회의 끝 프로그램에 남·녀학교 교사 대항 500m 경주가 있는데, 매번 패했다더니 금년에는 내가 뛰면서 작전상 여학교 선생을 따라 가기로 하고 200m 남겨놓고 질주하여 남학교가 1, 2 등을 걸머쥐니 산성공원이 떠나갈 듯하였고, 내 생애 가장 기분 좋은 선물 이었다고 회고한다.

1923년 9월 12일 [동아일보]에 9월 7일 민립대학취지선전강연회가 우중에도 성황을 이루었다며 2·8독립선언 윤창석 등의 연제와 연사가 밝혀졌다. 쉴 틈 없이 공주(충남)의 개화를 외치는 안신영 선생님의 코넷연주가 테이프를 끊었다.

1923년 9월 29일 [동아일보]에 의하면 이미 25일부터 영명영어야학강습 생도를 모집하고 있었다.
강사는 우리암 선교사, 우애리시 여사, 방은두 선교사, 윤창석 교사, 안신영 교사 이다.
야학운동은 “선 실력양성 후 독립”을 표방한 준비론적인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실력양성운동 일환으로 전개된 야학운동은 문화계몽운동의 주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1925년 10월 1일 [소년동아일보] 공주영명학교대강당에서 공주영명학생기독청년회주최 소년소녀동화대회가 성황을 이루었다. 안신영씨의 ‘장생불로도’ 등 여러 가지 여흥도 많이 있었다.



틈틈이 공부의 비결 안내
① 각 과목담당 선생의 강의를 잘 듣기, 10시간의 복습보다 좋은 성적 얻을 수 있다.
② 한 과목에 취미를 붙이기, 자신의 흥미와 특기를 살릴 수 있다.

교육자는 학생을 위하여 있다
①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② 어떻게 하면 실수를 고쳐줄 수 있을까?
③ 어떻게 하면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이 될까?
④ 어떻게 하면 스스로 사람이 되게 해 줄 수 있을까?
⑤ 어떻게 하면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할까?

나는 선생의 허세가 싫어
위신과 권위에 대하여 남다른 생각을 하며, 학생들이 세워주는 권위와 위신이 진정한 것이다.
1929. 27세 3월 21일 공주체육회발기에 참여하여 창립총회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동아일보]
1933. 31세 : 공주 영명여학교 교감으로 전임되었다.(역사, 지리, 영어, 음악과 담당). 문과출신으로 국어과 담당 외에 평소 자신 있는 영어, 집안 내력인 음악, 취향을 살린 연극, 체육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진정성을 보였다.

1935. 4. 15. 평양정의여고 전임, 안신영씨 송별 음악과 축구로, <공주> 공주에서 음악선생이며 운동가이신 안신영씨는 공주영명학교에서 13년간을 하루같이 있으면서 공주 운동계와 음악계의 개척에 공적이 많아 공주 상반정 공제의원 내에서 유지가 화합하여 송별회를 개최한다.
송별음악회와 송별축구대회 일시와 장소는 추후 발표하기로 하였다 하더라.[동아일보]

1981년 4월 4일자 [동아일보] 나의 교유록(이철경)에 신뢰와 존경으로 대하였던 ‘인상 깊은 동료교사’란에서 서무를 겸직한 영어선생 안신영과 고몽혜 선생을 소개하고 있다.
돌아가신지 5-6년 후의 회고록이다. 평양정의여학교 재직 때(1938년)에 다재다예, 외유내강한 성품이 마음을 끌었고, 영어, 음악, 운동도 전문가 이상의 수준급으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다고 흠모한다.
교육 다음으로 전공을 살린 문필 생활
어려서부터 좋아한 옛이야기와 글짓기

1905년부터 할머니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글짓기 소재로 충분하다.
1920년 학창시절에 ‘연희전문학교 교가’ 현상모집에 당선되었다.

한강을 半낫에 안고서 (한강을 반 낮에 안고서)
푸른숲에 깊이싸힌 연희언덕에(푸른 숲에 깊이 싸인 연희언덕에)
우뚝 소슨 집 우리학교일세 (우뚝 솟은 집 우리학교일세)
1925년 공주영명고등학교 재직 시절에 기독신보(1915년 재한 미국 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선교회가 연합으로 발간하던 주간신문) 현상 단편소설 부분에 “오늘의 모세”로 당선되어 연재되었다.
1926. 07. 05[동아일보]. 순회탐방(4) 공주지방대관(1) 교육계 영명여학교와 영명남학교를 방문하면 ‘도출대원, 인성량재(道出大原, 人成良材)’라는 대리석의 초석(礎石)을 볼 수 있다는 기사가 있다.
“도리는 큰 그릇에서 나오고, 사람은 쓸모 있는 귀재로 성장하자” 즉 영명학교는 양재를 양성하는 학교라 하였다. 안신영 선생은 이러한 양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클럽활동을 도입하고 연극, 뮤직클럽, 농촌봉사, 문예 잡지를 발간한 셈이다.

공주 영명학창 시절부터 각종성금도 자진하여 납부하였고, 1928년 2월 18일에는 영명학원에 보습과 설치비로 방기순, 성보영 제씨가 적극 활동하였다. 안신영도 김근배, 강윤 등과 같이 각각 100원씩을 기부하였다. 최고 300원부터 5원까지 48명이 협조하였다.

안신영이 부임 때부터 뜬소문이 실화가 되어 1926년 8월 12일 오후 3시 평양출신 김영복과 결혼하게 되었다.(이화학당강당, 목사 김종우 주례)[동아일보]

1927.12.09. <기사> 충남 공주 한글연구회 중심으로 나시영(羅時榮, 공주청년회 원로 중 일인)씨 외 지난 3일 본정 동춘루에서 찬동자 10여인이 월간잡지 ‘백웅(白熊)’을 신년부터 발행한다더라.[동아일보]

1928. 2월 1일 충남 공주(公州)에서 나온 문학동인지 ‘백웅(白熊)’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동인으로는 양고봉(梁孤峯:在應)·윤파운(尹把雲:相甲)·철수(康喆洙)·철고(鐵鼓:金鍾國)·진우촌(秦雨村:宗爀)·엄흥섭(嚴興燮)·운공(雲公:高雲興)·금원(琴園:安信永)·박아지(朴芽枝:一) 등이 참여하였다. ‘백웅’보다 앞선 문예지 ‘습작시대’, 1927. 2. 발행소가 진종혁(秦宗爀)이 거주하는 인천·용리(龍里) 60 <습작시대사> 이다.



공주의 근대 문예지 ‘백웅’에 관하여

2015년 8월 5일(수)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고마나루 실에서
조동길(학술논문, 새국어교육 제96호, 2013)에 의하면 ‘백웅’ 창간호와 2호 를 분석한 내용을 종합하여 이 잡지의 의의와 가치를 다음과 같이 판단,
⑴ 기존 학자들의 언급과 달리 동인지가 아니라 순수문예종합 잡지였다는 점,
⑵ 우리 문단 초창기의 사정을 감안해 볼 때 근대문학의 주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
⑶ 공주(충남)의 근대문학 출발 시기를 앞당길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크다는 점,
⑷ 중앙 집중의 문단 현실에서 지역 문학의 거점 내지 균형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근대문학에 대한 관심 자체가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시기에 이런 잡지가 발행될 수 있었던 사실은 공주의 근대를 더욱 풍요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회 문화적 의미가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창간호 작품 중에서 시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원(琴園) 작].

흰곰이 낳네! 흰곰이 낳네!
곰나루 언덕 넘어
곰 고을에서
소문도 없이
흰 눈이 내릴 때
흰옷을 두른 흰곰이 낳네!

흰곰아! 흰곰아!
네가 누리에 나오기 전에 어데 있었느냐?
하늘 위에냐! 땅 아래이냐?
아니란다 아니란다
높이 여섯 자 못 되고 너비 자가옷 못 되는
움직이는 것의 마음속이라네

흰곰아! 흰곰아!
귀여운 너를 낳은 이는 누구이냐?
산 넘어 총각이냐? 물 건너 새아씨냐?
아니란다 아니란다
무궁화라는 꽃이 피는 곳에 사는
흰옷을 입은 사람이라네

흰곰아! 흰곰아!
쓰라린 바다에 네가 왜 나왔느냐?
부귀를 얻으러? 공명을 얻으러?
아니란다 아니란다
생의 마음 밭을 갈아주는
쟁기가 되려고 나왔다네.

* 필자 조동길 교수는 원문의 낱자 고어 표기는 현대어로 바꿨으며 띄어쓰기를 교정[편자 박철희가 다시 수정].

‘금원(안신영)은 이 잡지의 창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물로 추정’함은 아래 글을 살펴보면 마땅하다고 본다.

흰돌 안신영은 백의민족의 상징인 ‘흰 돌은 깨끗한 돌이요 순결한 돌이며 살아있는 돌이다’. ‘흰 빛은 찬란한 빛이요 영광의 빛이다’라고 민족성을 은근히 강조하였다. 흰곰, 흰옷, 흰 눈, 흰떡, 흰말, 흰 개, 흰 코끼리 – 얼마나 고귀한가!
[안신영 자서전 「진실에 산다」]

1936.10.28. 평양음악회(平壤音樂協會)의 발회식(發會式)이 평양부 화신식당(平壤府 和信食堂)에서 거행된 바, 이날의 위원(委員)과 회원(會員)은 다음과 같다.

平壤音樂協會의 委員과 會員
위원장 : 권태호.
상무위원 : 안신영·김영석·양요환·김성남. 4인.
회원 : 한영길·방창덕·정달빈·박유현·이선주·박종현·전태홍·이양선·변승옥·오천석·김인석·전약한·귀애다·황순옥·한보풍·이철경·이영례·김명애·이문희·이태영·최경례·방인도·박영덕·최신덕 24인등 모두 29명이다.[조선일보]

내 글은 솔직, 간결, 영어로 Simple Literature 즉 간결 문학

읽기 쉽고, 읽는 대로 이해할 수 있고, 읽기시작하면 다 읽고야 마는 재미있는 글이다.
즉 ① 쉽게, ② 재미있게, ③ 유익하게 책을 편간하여 가르치는 것이다.
남의 부탁으로 번역(영역)과 편집된 책이 출판된 것만도 다음과 같다.[진실에 산다].

1941년 04월 07일 소녀가요제(少女歌謠祭) -콩쥐 팥쥐- 안신영 원작(安信永 原作), 서항석 구성(徐恒錫 構成)으로 개최되었다.

한글맞춤법비결을 비롯하여 통상회의법, /영문법 강해, /알기 쉬운 영작문, /통상회의법, /행복의 비결, /무엇을 믿나?, /놓임(극본 Release 번역), /누가 이기나?, /생각해 보세요, /좋은 노래, /즐거운 노래, /어린이 노래 외 /신생사 한영사전 번역 편집, /신약성서 골동번역, /성서주해, /가정생활 설계 등.[진실에 산다].

1973. 병상에서 고통을 이겨내며 자서전(유고)을 남겼다.
1975년 5월 25일 오후 9시 20분 서울 종로구 견지동 18번지 자택에서 소천 하였다.
안신영의 글은 여기 제시한 것 등 30여 작품이 있다.

흰돌 안신영의 기독교생활
1976. 5. 25. 소천 일주기에 [흰돌 안신영 『진실에 산다』]가 출간되었다. 그 67쪽에 “내가 70평생을 회고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자서전 『진실에 산다』 제2부에는 ‘인간은 우스운 존재니라’에 25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인간으로 살면서 소감을 옮기셨다. 또 제3부에서는 믿음의 바탕이 된 성경말씀 중에 금과옥조(金科玉條)에 해당되는 80편을 모아 평전을 곁 드려 읽는 이들에게 보탬이 되도록 글을 남기셨다. 자서전 전체가 교회에서도 들을 수 없는 설교집이다. 비신자도 읽으면 삶에 크게 도움이 될 명언집이다.

“안신영이 70평생을 회고하면서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나는 어려서 승벽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두 살 위의 기형 형을 이기고야 말았는데, 사실은 내가 이긴 것이 아니라 착한 형이 져주었다고 한다.” [진실에 산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진실에 살다

“나는 나면서부터 기독교인이다. 북실에서 기막힌 핍박을 받아 1907년 공주로 이사, 감리교회를 착실하게 다녔다. 1916년에는 서울로 이사, 정동교회를 다니고 1918년부터는 아버지가 담임하는 창내교회의 주일학교와 소년소녀 성가대를 육성하였다”.
“나의 종교생활에서 기적적인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한다면 풍금연주이다. 나는 한 시간도 음악과 풍금을 배운 일이 없다. 다만 옥살이할 때 감방마루에 건반을 그려놓고 화음 4부 연주를 고안하였고, 창내교회에서 반주를 하니 깜작 놀랄 정도라 하였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었다’고 신앙 고백을 하였다.”
“공주에서는 공주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 평양에서는 박구리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 1939년부터 공덕리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 1941년에는 중앙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 그 외 김촌교회를 돕다가 다시 중앙교회로 돌아와 1973년에 은퇴하였다”.[진실에 산다].

1925년 6월 6일자 [동아일보]에 지난 5월 30일에 충남공주엡웟(Epworth)청년회 정기총회를 거쳐 임원에 회장 김운각, 부회장 안신영, 서기 이재백 등이 당선되었다.

나는 교회제도의 혁신이 필요함을 느껴

공주에서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말고 ‘진리를 찾아내라’고 말하였다가 목사와 크게 충돌한 일이 있다. 나는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하였고, 좋은 성경 구절을 많이 외웠던 것이 내 생활에 아름다움을 주었다. 기도를 생활화 하되 계시와 신유를 믿지만 ‘주관적인 말과 괴성은 사탄의 짓이라’고 회상 한다.

흰돌 안신영 『진실에 산다』에서

등 33가지는 “나의 정신 유산이므로 내 자녀들에게 끼쳐주고 싶은데, 받고 말고는 자유이나 내 양심은 부끄럽지 않음을 밝힌다.”
나의 영혼(soul), 정신(spirit), 마음(heart)은 무형이다. 유형유산(재산)은 거의 없다. 대신 대학교육은 시켰다.

“진정한 승리와 성공과 평화와 행복은 건전한 정신에 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사랑(love)이다. 서로 돕고 서로 믿고 서로 섬기는 생활이 사랑이다”.

“나는 자호를 ‘흰돌’이라 하였는데 1925년 글 현상 모집에서 처음 썼다. 흰돌은 무한 가치가 있어 좋고, 무엇보다도 흰돌은 진실을 상징해서 좋으며, 그러니까 ‘흰돌’은 ‘진실에 산다’의 짧은 말이다”.

“나에게 호칭할 때 ‘안신영 선생’이라고 불러주오.
교장, 총무, 국장, 이사장 등의 직함은 사용할 수도 있지만 ‘안신영 선생’이 제일 좋다.
반면에 내가 아주 싫어하는 칭호는 ‘‘안신영 장로’이다. 나는 1972년부터 교회법으로 장로가 아니다. 말소되었다. 원래 원하지 않았는데 장로를 시켜놓고 그 이름을 빼앗아간 셈이다”. [진실에 산다].

퇴임 후 수많은 일(버거운 짐)을 즐겨

1962. 의무 봉직하는 감리회 총리원 사무국총무로 취임하였다.
1965년부터 : 학교법인 영명학원 운영이사도 6년 동안 역임하였다(1970).
1965. 63세 : 재단법인 기독교방송국 이사로 취임하였다. 당시 내가 창안한 독서구락부(Reading Culb)운동은 동남아시아 회의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매일 30분 독서 30분 평가 하는 제도).

내가 참석한 국제회의

1958.08.15. 동남아시아 기독교문서 협의회(일돈 하꼬네, 도꾜).
1965.05.17. 세계 계명사업, 기독교문서 연구회(예루살렘).
1967.04.01. 국제 출판협의회(미국 Stony Point, New York).
196?.05.20. 아시아 문서협의회(필리핀 마닐라).

1967. 65세 : 재단법인 기독교방송국 국장대리로 취임하였다.
1967년 10월 4일 <한국기독교의 토착화 발디딤 ; 새 찬송가(순수한 우리찬송가) 24곡 나온다> 김재준·홍현설·안신영 외 작사하고, 박재훈·박태준·나운영 등이 작곡한 찬송가이다.[경향신문 5면]

1967년 대한기독교 교육협회 총무 한영선 목사 추천으로 이태섭의 ‘새로운 어린이 찬송가’ 150장인데, 작사, 작곡의 기명이 전혀 없고, 다만 서문 부분에 장수철·박재훈·김두완·안신영·이태섭이라는 글뿐이다.

투철한 봉사정신이 신약성경 번역 출판

1967년 12월 15일에 [새 번역 신약성경]이 출판되었다. 한글 고문으로 한갑수, 문장 위원으로 전영택·안신영·임한영·박영준·석용원·김재준 제씨, 원문 대조위원으로 지원용·윤성범·곽안전 제씨, 서기는 정용섭 목사가 수고하였다.

1970. 68세 : 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으로 촉탁되었다(신약 새 공동번역 완성).
1971. 69세 : 의무 봉사직 활동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 촉탁을 사임하고, 재단법인 기독교방송국 이사도 사임 하였다.

안신영 작사 작곡(예시)

영명학교를 떠난 뒤에도 모교 제30주년, 제50주년 기념식에 참여
-영명 첫 한국인 교사 자형 윤성렬과 함께-

1936년 10월 22일 (一千九百三十六年一十月二十二日).
公州永明校 卅週年紀念祝賀 十六日盛大히 擧行

참석자 尹聖烈, 金應泰, 李明濟, 玄彦東, 權益采, 柳淸鉉, 趙炳玉, 黃仁植, 劉復烈, 安信永, 黃銀植, 公州私立永明寶修學校, 平壤, 京城, 天安, 禮山, 大田 외 [매일신보].

뒷줄 좌부터 안신영, 중앙 변홍규, 우 두번째 남정관 선생님
아래 좌측두번째 서덕순, 조병옥, 황인식, 우측 두 번째 윤성렬 선생님(목사)

1956년 개교50주년 기념사진

안신영(安信永) 연보
1902. 출생 : 충남 청양군 장평면 적곡리 북실(마을)에서 출생.
1906. 4-5세 :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심취.
1908. 6세 : 공주영명학교 초등과 입학.
1910. 8세 : ‘나라가 망했단다’라며 눈물짓는 선생님들을 보고 ‘대장’이 되겠다고 결심.
1912. 10세 : 공주사립영명학교 고등과 입학.
1916. 14세 : 서울 배재학당 본과 2학년 편입학.
1918. 16세 : 서울 배재학당 본과 졸업. 한글연구를 평생사업으로 결정.
1919. 17세 : 서울 3·1만세시위 참여(형 사영, 기영 동참).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입학, 4월 7일 기영 형과 헌병대로 끌려감.
                      ‘독립만세 부른 것이 잘못되었다’라고 자백 강요. 기영 형은 큰형 사영 형과 신흥무관학교 간다고 사전 약속 때문에 거짓 자백하고 곤장 30대로 석방.
                      나는 끝까지 버티다가 미결수 4개월, 기결수 6개월 옥살이.
1923. 21세 :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졸업. 공주사립영명학교 교사 부임.(영어, 역사과 담당).“흙을 찬미한다!” 지음.
1926. 24세 : 공주영명학교 교원 안신영군과 수원남양제하여학교 김용복양이 8월 12일 결혼.
1927. 25세 : 공주체육회발기 창립준비위원. 충남공주엡웟청년회 부회장
1928. 26세 : 충남 공주 ‘백웅’ 창간호(흰곰이 낳네!), 제2호 발간, 백웅사.
1930. 28세 : “물렁감(홍시)” 지음.
1933. 31세 : 공주 영명여학교 교감 전직.(역사, 지리, 영어, 음악과 담당).
1935. 33세 : 평양 정의여자고등학교 취임(조선어 담당). “일곱 아내” 지음.
1936. 34세 : 평양음악협의회 상무위원 피임. 영명개교제30주년기념식 참석.
1937. 35세 : 평양경찰서 구치. 공주사립영명학교에서 조선어와 조선노래 가르친 것(무죄), 조선어 교재 발간 등 출판법위반 죄로 옭아 넣어서 평양감옥 옥살이.
1939. 37세 : 서울 정동 미국 감리회 선교부 회계직 취임. 노량 동양공과학원 강사.
1941. 39세 : 소녀가요제 –콩쥐 팥쥐- 개최(안신영 원작, 서항석 구성)
1944. 42세 : 배재고등학교 교사 취임 겸 재단법인 회계.
1945. 43세 : 배화고등여학교 교사 취임(영어, 국어 담당).
1950. 48세 : 미국공보원(USIS) 주간신문 ‘세계주보’ 주필(부산).
1951. 49세 : 부산에서 배재고등학교, 중앙고등여학교 영어, 국어, 시사해설 강사.
1952. 50세 : 기독교 간행물 ‘다락방’ 편집 취임.
1953. 51세 : 대한 계명협회 총무 취임. 한글교육, 성인교육, 간결문학 출간. 농촌출장 지도.“파랑새의 행복” 지음.
1955. 53세 : 재단법인 기독교 방송국 감사 추임. “술 한 잔의 조화” 지음.
1956. 54세 : 영명개교제50주년기념식 참석(윤성렬, 황인식, 조병옥, 서덕순, 변홍규, 남정관)
1957. 55세 : 비리 그래함 지음, 안신영 옮김, “행복의 비결”, 백조서점.
1960. 58세 : “길 잃은 양” 장로교 선교부에서 영문(1954)을 국역하여 출판. “무엇을 믿나?” 출판.
1961. 59세 : 모교 배재중·고등학교 교장 취임. 입학생은 도의교육이 된 씩씩, 건강한 학생 환영, 특기는 인정하지 않음.
1962. 60세 : 배재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 감리회 총리원 사무국 총무 취임.
                      10월, 찬송가연구위원회 설치, 위원 : 마경일 안광국 곽안전 안신영 박태준 서정태 오영필 엄요섭.
1965. 63세 : 재단법인 기독교 방송국 이사 취임.
1967. 65세 : 재단법인 기독교 방송국 국장대리 취임.
1970. 68세 : 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 촉탁(신약 새 공동번역 완성).
1971. 69세 : 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 촉탁 사임. 재단법인 기독교 방송국 이사 사임.
1972. 70세 : 웨인 앤더슨 지음, 안신영 옮김 “가정생활설계”, 새가정 8·9월호(통권 206호)
1973. 71세 : 병상에서 자서전 『진실에 산다』 유고 남김.
1974. 72세 : 자서전 제2부 “인간은 우스운 존재니라” 머리말 찬술(1월 30일)
1975. 75세 : 소천.
1976. : 안신영 자서전 『진실에 산다』 출간, 서울 도문사.
2006. : 국가보훈처 [건국훈장 애족장 (2006)] 추서.
2015. : 공주학포럼[白熊 조명 : 조동길 교수], 공주학연구원(8월 5일)
진실에 산다라는 가훈 말씀을 이곳에 작성하는 이유(안창식 씀)
백송의 집에서 아버님의 가훈을 생각하며
삶에 바빴고 일에 쫓기면서 손에 잡히지 않았을 뿐 !!
항상 내 마음 중심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것은 선친께서 생전에 남기긴 장문(長文)의 가훈(家訓) 편지였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명언도 아니고 명구도 아니지만 구구절절 내 아버지의 체취가 묻어난 간절한 말씀이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亡者)의 유품(遺品)들을 소각하거나 없애는 일이 우리 풍속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선친이 남기신 유훈과 유작을 간직했고 마침내는 이것을 소책자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홈페이지상에서 알린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조금은 겸연쩍은 일이었지만 내가 그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선친께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고 나중에 가책을 받을 것 같아서 용기를 냈습니다.

가족들이 반대도 있었습니다.
뚜렷한 명분도 없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009년 7월 29일 내가 혈액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에 있음을 감안할 때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고집했습니다.
누구에게 자랑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출간하여 독자들에게 배포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정리하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을 뿐입니다.

흰돌 안신영
저희 아버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시어 계속 교계(敎界)와 교직(敎職)에서 평생을 마감하신 분입니다.
‘흰돌’은 아버지 아호입니다.
흰돌 (white stone)은 성경.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단어입니다.

가친께서 남기신 말씀은 과거 생존해 계셨을 때이니 만큼 45년이나 지나간 옛 이야기 이지만, 성경을 토대로 진술한 것이기 때문에 시대가 반세기를 지났어도 퇴색하지 않고 아직도 영롱하기만 합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진실 된 이야기는 진실로 통하는 가 봅니다.
선친께서는 ⌜진실에 산다⌟는 가훈을 정하시고는 실제로 그러한 생활을 하시도록 노력한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저 역시 아버지의 그 아들로써 그러한 생활을 하도록 계시 받은 대로 생활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선친의 셋째 아들인 백송 안창식 베드로는 혈액암 판정을 받은 7년 전부터 생전 가친께서 평소 말씀하신대로 그날부터 성경책을 펴들고 읽고 또 읽고 밤을 지새가며 해답을 얻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2009.7.29. 다발성골수종 판정- 서울 성모병원 M 박사)
주님의 음성은 ‘히스키야’ 왕에게 내리신 열왕기(列王記) 하권에서 히스키야 왕이 15년간 덤 생활을 받았던 대목에 저의 마음에 확근히 닿았습니다. 진실에 산다라는 가훈을 남겨주신 아버님께 대한 효성을 백송의 집을 통하여 이곳에서 후대의 자손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떠 오른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후대의 자녀들에게 남기고 싶은 것은 ‘흰돌 안신영’ 할아버님이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조상임을 알리면서 흰돌께서 1967년 합동 찬송가를 편찬할 때 작곡하신 488장 찬송가(하늘가는 밝은 길이)가 1967년도 합동 찬송가에 실렸는데 1986년 개편 찬송을 작업하였던 기독교 교계 사정을 몰랐었고 이때 아버님의 2곡이 삭제되어( 이찬진 목사의 찬송가 이야기) 자식들의 불찰로 여겨지니 아버님을 먼 훗날 찾아 뵐 자식 된 면목이 없음도 고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버님의 ⌜진실에 산다⌟는 원문을 이곳에서 소개하며 홈페이지의 끝 부분에 1967년도 손수 작사 작곡하신 찬송가 2편, 작사 1편을 실어서 영원히 이 세상에 밝히려는 뜻도 담겨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자이 아파트 108동 1604호
가양동 성당 9구역
안 창 식 베드로 드림
진실에 산다 원문(안신영 씀)
책머리에
삶에 바빴고 일에 쫓기면서 손에 잡히지 않았을 뿐 !!
항상 내 마음 중심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것은 선친께서 생전에 남기긴 장문(長文)의 가훈(家訓) 편지였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명언도 아니고 명구도 아니지만 구구절절 내 아버지의 체취가 묻어난 간절한 말씀이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亡者)의 유품(遺品)들을 소각하거나 없애는 일이 우리 풍속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선친이 남기신 유훈과 유작을 간직했고 마침내는 이것을 소책자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홈페이지상에서 알린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조금은 겸연쩍은 일이었지만 내가 그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선친께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고 나중에 가책을 받을 것 같아서 용기를 냈습니다.

가족들이 반대도 있었습니다.
뚜렷한 명분도 없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009년 7월 29일 내가 혈액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에 있음을 감안할 때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고집했습니다.
누구에게 자랑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출간하여 독자들에게 배포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정리하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을 뿐입니다.

흰돌 안신영
우리 아버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시어 계속 교계(敎界)와 교직(敎職)에서 평생을 마감하신 분입니다.
‘흰돌’은 아버지 아호입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서 한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가친께서 남기신 말씀은 과거 생존해 계셨을 때이니 만큼 45년이나 지나간 옛 이야기 이지만, 성경을 토대로 진술한 것이기 때문에 시대가 반세기를 지났어도 퇴색하지 않고 아직도 영롱하기만 합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진실 된 이야기는 진실로 통하는 가 봅니다.
선친께서는 ⌜진실에 산다⌟는 가훈을 정하시고는 실제로 그러한 생활을 하시도록 노력한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저 역시 아버지의 그 아들로써 그러한 생활을 하도록 계시 받은 대로 생활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선친의 셋째 아들인 저는 혈액암 판정을 받은 7년전 2009년 7월 29일부터 생전 가친께서 평소 말씀하신대로 그날부터 성경책을 펴들고 읽고 또 읽고 밤을 지새가며 해답을 얻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히스키야’ 왕에게 내리신 열왕기(列王記) 하권에서 히스키야 왕이 15년간 덤 생활을 받았던 대목에 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제가 이 글을 자녀에게 남기고 싶은 것은 ‘흰돌 안신영’ 할아버님이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조상임을 알리면서 흰돌께서 1967년 합동 찬송가를 편찬할 때 작곡하신 488장 찬송가가 지금은 자식의 불찰로 삭제되어 자식된 면목이 없음도 고백하고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버님의 ⌜진실에 산다⌟는 소책자를 편찬하면서 끝 부분에 찬송가 2편, 작사 1편을 실어서 영원히 이 세상에 밝히려는 뜻도 담겨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안 창 식 드림

흰돌 안신영 님
경력
1908년 6세 : 공주영명학교 소학과 입학하였다.
1910년 8세 :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었을 때로 김관회 선생 영향으로 이때부터 독립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912년 10세 : 공주사립영명학교 고등과에 입학한다.
1913년 이후 : 어느 때부터인가 좌우명을 가슴에 품었다.
1918년 16세 : 서울 배재학당 본과 졸업. 한글 공부는 주시경을 따라 배재에서부터라고 자서전에 전한다.
1919년 17세 : 서울 3·1만세시위 참가하였다(형 사영, 기영 동참).
1919년 17세 :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입학, 4월 7일 기영 형과 헌병대로 끌려갔다.
1923년 21세 :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졸업하였다.
1923년 : 공주사립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과, 역사과를 담당하였다.
1923년 9월 12일 : [동아일보]에 9월 7일 민립대학취지선전강연회가 우중에도 성황을 이루었다며 2·8독립선언 윤창석 등의 연제와 연사가 밝혀졌다.
쉴 틈 없이 공주(충남)의 개화를 외치는 안신영 선생님의 코넷연주가 테이프를 끊었다.
1927년 : 공주사립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할 즈음 공주에서 ‘한글연구회 조직’하였다.
1929년 27세 3월 21일 : 공주체육회발기에 참여하여 창립총회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동아일보]
1933년 31세 : 공주 영명여학교 교감으로 전임되었다.(역사, 지리, 영어, 음악과 담당).
1935년 4. 15 : 평양정의여고 전임
1936년10.28 : 평양음악회(平壤音樂協會)의 발회위원
1937년 35세 : 안신영을 공주사립영명학교에서 조선어와 조선노래를 가르친 것을 트집 잡아서 ‘조선어 교재 발간’ 등을 출판법위반으로 옭아 넣어 평양감옥에서 옥살이 하였다.
1941년 04월 07일 : 소녀가요제(少女歌謠祭) -콩쥐 팥쥐- 안신영 원작(安信永 原作), 서항석 구성(徐恒錫 構成)으로 개최되었다.
1957년 : “행복의비결” 비리 그래함 지음, 안신영 옮김
1960년 : 안신영, [무엇을 믿나?]
1972년 : “가정생활설계”, 새가정 8·9월호(통권 206호), 웨인 앤더슨 지음, 안신영 옮김
1973년 : 병상에서 고통을 이겨내며 자서전(유고)을 남겼다.
1975년 5월 25일 오후 9시 20분 : 서울 종로구 견지동 18번지 자택에서 소천 하였다.

‘흰돌’님이 아끼고 사랑하신 자손
▢ 장남
자(子) : 광식
부(婦) : 숙자
손(孫) : 세현 미현

▢ 차남
자(子) : 효식

▢ 삼남
자(子) : 창식(昌植)
부(婦) : 태숙(泰淑)
손(孫) : 정현 승현

▢ 사남
자(子) : 성식

▢ 일녀
자(子) : 문식

아버지로써 할아버지로써 이 글을 남긴다.
안 신 영
나의 생활 철학
내게는 한 없이 값나가는 가보는 있지만 조금도 돈 이 되는 가보는 없다.
내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보(家寶)도 없거니와 후손들에게 전해 줄 돈 나가는 가보도 없다.

한 없이 값나가는 가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이요 길이요 빛이요 기쁨이요 희망이요 위로인 성경책이다.
내가 지니고 있는 가죽 뚜껑 성경 책 만이 가보는 아니니까...
이 가보를 누구든지 가지도록 해라.
장식품 마냥 책장에 꽂아둘 것도 아니요 귀중품 마냥 상자 속에 잠가들 것도 아니다. 때가 묻고 뜯어지고 해지도록 읽고 읽고 또 읽어라.
인생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처세에 대한 번뇌가 일때 ,
특히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외로울 때,
읽어서 해결을 얻어라.
해결을 얻을 때 까지 읽어라
성경의 골자는 예수님 말씀이며 구약은 예수의 말씀의 배경이다..

예수의 말씀은 복음(마태, 마가, 루가, 요한)에 있고 사도행전 이하는 부록이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이 수행한 전도 활동 기록 을 발췌한 것이다.
그 이하는 서신(書信)이 대부분으로 이를테면 서신 을 쓴 이들의 신앙고백이요 마지막 계시록은 일반 대중이 알 수 없는 글이므로 알고 싶으면 연구해야 한다.

나는 예수의 말씀을 골라서 애독하는 버릇을 가졌다. 쉽고도 높고, 넓고도 깊다.

⌜진실에 산다 ⌟
이 가훈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家訓)이 아니라 내가 세운 가훈이다.
이것이 가훈이니까 너희들은 이 가훈대로 살아야 한다고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너희들 나름대로 가훈을 세워라.
나와 공명(共鳴)되거든 이 가훈을 계승해도 좋다.
이 가훈의 토대는 성경 말씀이다.
풀이는 나중에 하겠다.

내가 이 가훈대로 살았다고 자랑도 못하겠고 증언도 못하겠다.
⌜진실에 산다 ⌟를 정성껏 궁행했음을 떳떳하게 내 세울 수는 있다.

‘진실’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무엇보다도 ‘성(誠)’ 과 통한다고 하겠다.
정성껏 성의껏 성심껏 충성. 효성. 성실 등의 ‘성’이 곧 ‘진실’이라는 말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성’이 곧 ‘진실’이다.
진실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알아주신다.

“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태 6:33)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으로써 맨 먼저 할 일이 진실에 사는 일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진실이다.
그런데 세상은 권세와 이익을 먼저 구하고 있다.
너희는 다만 “예” 할 것을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라.
여기서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오는 것이다.
이 말씀도 예수의 말씀이다.(마태5:37)
흑백을 흑백 그대로 말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세상은 곧 잘 흑을 백이라 하고 백을 흑 이라 한다.
생명유지를 위해서도 그리하고 편당 이익을 위해서도 그리한다.
정의를 위해서 “예”를 “예”라하고 “아니요”를 “아니요”라 하여 목숨을 잃든지 이익을 놓지든지 하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간주한다.

예수는 위선과 가식을 몹시 싫어하셨다.
쇼 같은 기도, 쇼 같은 금식, 쇼 같은 구제 등을 배격하셨다.
“나 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마태7;21)
이 예수의 말씀도 진실을 떠난 신도들을 경계하신 말씀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진실에 산다는 말이다.
이율배반적인 사람은 결코 하늘나라에 가기에 앞서 신자라고 할 수 없다.

남의 집을 찾아가서 주인에게 인사하기 전에 앉자마자 기도를 드린다.
잠깐도 아니다. 한참이다. 그런데 고개를 들자마자 싸움을 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기도는 왜 했을까? 싸움을 잘하게 해 달라고 했을까? 싸움에 이기게 해 달라고 했을까? 기도와 싸움은 이율배반이 아닌가?

한 교파의 우상 같은 존재인데 공금을 횡령했다.
이 사실이 만 천하에 드러났다. 그런데 그 위대한 지도자는 여전히 우상 노릇을 하고 있다.
신앙과 품행은 별도라고 우상과 우상숭배자들은 말한다. 이 역시 이율배반이 아닌가?
예수의 책망을 받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연상된다.(마태 23: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마태 5;3-10)말한 야고보 선생의 경고가 생각난다. 선량한 신앙인은 선량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 이라고 나는 본다.

예수의 산상 설교의 팔복(八福)을 잘 읽어 보면
➀ 마음이 가난하다.
➁ 애통한다.
➂ 온유하다.
➃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➄ 자비하다
➅ 마음이 깨끗하다.
➆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
. ➇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
이 여덟 가지의 행동은 한 말로 “진실” 이요 “진실에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과 같다. (마태 5:3-10)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3-16) 예수는 말씀하셨다.
소금과 빛은 진실 그것이다.
소금과 빛이라는 진실 앞에서 부패와 부정은 드러나고 교정되고 승화되는 것이다.
예수의 달란트 비유 가운데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 하였다. 네가 작은 일에 신실했으니 내가 큰일을 네게 맡기겠다”(마태 25:21,23)라는 말이 있다.
신실(信實)은 곧 진실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일을 도맡게 되는 것이다. 이에 미루어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 사업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4)하신 예수의 말씀은 다른 쉬운 말로 바꿔치면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신령하고 진실하게 예배드려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신령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진실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진실을 떠나서는 예배가 없다.
형식도 좋다. 단순해도 좋다. 복잡해도 좋다. 앉아서 해도 좋다. 일어서서 해도 좋다. 엎드려서 해도 좋다. 꼭 알 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거룩하고 진실해야 한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거룩하고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손뼉을 치고 뛰면서 거룩하고 진실한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
이야기를 되는 대로 꾸미고 쇼를 하면서 거룩하고 진실한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물론 진실이 엄숙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눈가림이나 혀 놀림이 진실 일 수는 없다. 진리는 진실이다.
성경 말씀 가운데 “진리”라고 한 말씀은 “진실”과 통한다.
예수께서 스스로 당신을 ‘빛“이라고 선언하시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싫어하여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요한3:20-21)고 말씀하셨는데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진실에 사는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요한 1:14)
그리고 예수 자신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4:6) 갈 데로 가게 해 주는 것이 길이요 되어 질대로 되어 지게 해 주는 것이 진리 곧 진실이요 정말 사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이라는 말씀 대신 ”생명의 떡“이라고도 하였는데(요한6:35-48)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이라는 말씀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8:32)예수는 말씀하셨다.
참 자유는 진실에 사는 사람에게 있다.
진실에 사는 사람에게 얽매임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방종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기심 곧 자기만 이롭게 하려는 야욕이 있을 수 없다. 위에 말씀한 “진리”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인데 당신을 가리키신 말이다. 일반적인 진실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씀의 본뜻을 깨닫지 못하고 위의 “진리”를 일반 진실로 안다고 하더라도 진실에 살기만 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고 예수를 알게 되고 예수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실 것으로 나는 확실히 믿는다.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하신 말씀이다.
“ 나는 진리를 증거하려고 났으며 진리를 증거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음성을 듣는다.
빌라도는 이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진리가 무었이냐“? 하고 물었다.
진리는 하나님은 진실이요 하나님은 진실은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의 간곡한 기도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 주옵소서. 아 버지의 말씀은 진리 이옵니다“(요한 17:17)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요 우리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의 진리”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 진실은 없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일시적으로 불신앙을 저지른 사람도 있고 영원한 불신앙을 저지른 사람도 있다.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베드로나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은 토마는 성경에 기록된 일시적으로 불신앙을 저지른 사람들이요 다른 제자들도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일시적으로 불신앙을 저지른 것 같다.
진실에 사는 예수의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힘든 모양이다.
영원한 불신앙을 저지른 사람은 예수의 제자 가리옷 유다로 알려져 있다.
가리옷 유다에 관해서는 전설이 많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서는 마태복음에만 진술되어 있다.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으나 자기가 한 짓이 너무 어이 없어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마태22:3-10)
진실에 가장 큰 반대가 되는 ‘반역’이라는 불신앙은 참혹한 최후를 가져오는 것이다.

절대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성경 역사를 통하여 진실의 대표자를 뽑는다면 나는 서슴 치 않고 모세와 요셉을 들고 나서겠다.
모세와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고 하고 싶다.

진실 - 하나님이 다니시는 길이다.
인간이 인간 다우려면 걸어가야 할 길이다.
곧 의인의 길이다. 진실을 떠날 때에 그는 사탄의 사람이 되고 못난 인간,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이 된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내의 말을 쫒은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범죄에 대한 추궁을 당 할 때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는 핑계를 느러놓는 진실을 떠나 죄인의 조상이 되었고 가인은 착한 동생 아벨을 질투로 죽이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범죄에 대한 추궁울 당할 때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는 뻔뻔한 수작을 감행하는 진실을 떠나 살인자의 조상이 되었고 노아는 죄악이 만연한 세대에서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창세기5:9)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방주를 만들고 홍수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제2의 인류의 조상이라고 하겠다. 진실 그것은 인류의 새 조상이 되게 한다.

노아와 무지개의 전설-
노아는 40주야의 지긋 지긋한 홍수를 겪고 나서 하나님께 대들었다.
“하나님,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너무 과 하셨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하여서는 과 할것이 없다마는 안되기는 안 되었다. 다시는 그런 홍수를 내리지 않겠다”
‘언약을 하십시오. 은혜의 새 언약을 하삽시오“
”무지개가 나의 언약이다“ 일곱 빛깔의 아름다운 무지개는 이렇게 생긴 것이다.

제 2의 인류의 조상 노아는 아들 셋을 두었고 세아들 - 셈, 함, 야벳은 세계 각처로 퍼져 오늘의 세계를 이루었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이다. 이렇다면 세계 인류는 한 혈육이다. 그런데 한 혈육이 이렇게 치열하게 다투고 싸울 수 있을까? 있다. 진실을 떠나기l 때문이다. 진실만 되찾으면 살상은 있으려나 있을 수 없으리라.

창세기 11장 바벨탑의 이야기는 모호하다. 성경에는 인간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려고 애썼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를 막으셨다고 기록되어있고 성경 해석자들은 인간이 탑을 하늘에 닿도록 높이 쌓는 거만함을 지적하고 (4절) 하나님이 이를 막으셨다고 풀이하고 있다. 바벨탑 건축을 호의로 해석하면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상당히 였 보이고 달리 해석하면 달리 보이게 되는데 판가름은 인간의 진실성만이 해 줄 것이다.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조상이요 우리의 신안의 조상이다. 그런데 그는 절대적으로 진실하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복종하면서 생명 유지를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도 애굽왕 바로(창세기12:11-20)와 그랄왕 아비벨렉에게 (창세기20:1-18) 속임수를 쓴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장래의 큰 희망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신앙인이 생명유지를 위하여 오죽 쟎은 속임수를 썼다는 사실은 긍정하기 힘 든다.
성경 기록을 그대로 보면 바로나 아비멜렉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속은 사람들로써는 너무 너그럽고 너무 부드럽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도 되니까 아브라함으로써는 누이라 해도 속임수까지는 되지 않는다 변명 해 주는 큰 마음 가진 이들도 없지 않지만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라는 사실로는 바로나 아비멜렉이 재화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 재앙은 우리이게 많은 교훈을 준다.
무엇보다도 소돔과 고모라 성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는 하나님이 독단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처벌하시지 않고 인간과 먼저 의논 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인간은 인간을 위하여 하아님께 떼를 쓴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라 해도 의인 곧 진실한 사람이 설마 50인도 못되랴 생각하고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렵니까?
그 성중에 의인 50이 있어도 멸하시렵니까?
50의인을 인하여 온 성을 용서하실 수 없습니까?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셔도 안되고 의인과 악인을 동일시 하셔도 안됩니다. 공의로 심판하셔야 합니다”하고 마치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운 듯이 굴었다.
하나님은 쾌히 응락 하셨다.
의인 50인만 있으면 온 성을 용서하기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45인, 40인, 30인, 20인 그리고 10인까지 에누리 했고 하나님은 그것까지 응락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은연중에 깨닫게 되는 점은 의인의 값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 사람하나가 수 많은 부정 부패의 사람들을 살려 주었다는 엄청난 사실이다.
그런데 저들을 살려주는 은인을 저들은 무시하고 있다.
의인 10인은 한정 수가 아니다.
부정 부패의 사람 몇에 대하여 의인 몇이 반드시 있어야 재화를 면한다고 따져 내려들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으로써 알 수 없다. 인간의 일천이 하나님의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인간의 하나가 하나님의 일천일 수도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서, 롯의 아내가 세상 재물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대목은 너무도 잘 알려졌는데 롯 자신도 그렇거니와 롯의 식구들의 신앙이 보잘 것 없었나보다.
아브라함의 덕택으로 롯의 가족이 구원을 얻은 것 같다.
내 덕택으로 남을 구원 할 수 있다면 !
진실에 사는 사람만이 이런 덕택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불 진실- 불의 곧 죄악을 세상에서 없애어 버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홍수를 내려 물로, 유황불을 내려 불로, 말끔 불의를 씻어 버리고 태워버리셨다. 의의세계 진실의 세계를 재건하시려 한 것이다.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처벌이 계속해서 오늘 까지 되풀이 되고 있는데 언제 끝이 날지, 그리스도가 오시면 영원한 평화가 임한다고 했는데 그리스도는 벌써 오셨다고도 하는데, 진실에 사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이 분명하고나!

진실에 사는 사람은 무었보다도 눈가림을 않는다. 떳떳하게 산다. 용감하다. 권세를 두려워 않는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모세를 보라.
여호수와와 갈렙을 보라.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킨 모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들어가 국가를 건설한 여호수아와 갈렙. 그들은 진실에 살았다. 민족의 지도자가 진실할 때에 그 민족은 진실해진다.
민족의 지도자가 눈가림을 일삼을 때에 그 민족은 눈 가림만 하러 든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눈가림에 그칠 때 이른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그 진실성에 있어서 이방의 백성이나 자녀만도 못한 수가 있다.

에스더는 유다 여인으로 이방 나라의 대 군주 아하수애로왕의 왕후가 되었는데 이 민족 결혼이 벌써 진실성을 떠난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다. 에스더의 진실성은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4:16) 이 한마디에 있다. 자기 민족의 운명을 자기 목숨에 걸고 죽으면 죽겠다는 결심을 표현한 것은 티 한 점 없는 에스더의 진실이다. 자기 민족을 구원했다.

욥은 인내의 화신이다.
인내는 진실에서 산출된다. 욥은 불행을 당하고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갈지나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다” 인간이 이 만큼 진실하면 참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욥의 보증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이렇게 보증하셨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의 진실을 예찬하신 말씀이다.
진실에 살며 인내로써 극복한 욥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보상은 물질적으로 너무 후하다(욥기12:10-17) 진실에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후한 보상을 내려 주신다는 희망은 위험한 신앙에 속한다. 소년 다니엘의 진실은 그야말로 천추만대에 모범이 되라라. 권세 앞에서 굴복하지 않은 진실, 자기 신념에 철저한 진실, 소신대로 행동에 옮긴 진실- 현대인들은 어리석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에 고대 현대가 있을까? 다니엘의 풀무 이적과 사자굴 - 이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권능에 돌리면 그만이요, 이방 국가들의 대왕들이 소년 다니엘의 진실에 감복하여 그들도 진실에 사는 통치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된다.

요나의 이야기는 재미있고 우리에게 교훈을 많이 준다.
요나는 범인의 대표자다. 범인은 진실에 살다가 진실에서 떠났다가 진실에 돌아왔다가 진실을 피한다. 이해 관계인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진실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만은 사실인데 진실을 존귀l하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이 진실을 떠날 때에는 분개할 줄 알면서, 진실에 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모순 행위인가 보다.

하나님과 요나와 니느웨- 하나님의 섭리는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고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준행하면서 자신의 안전과 자신의 위신을 앞세웠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뒤로 돌리었고 자신의 위신을 위해서는 자기의 사명인 니느웨의 구원을 망각했다. 철저하게 진실에 사는 사람은 요나 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진실을 말해서 바다 물속에 던져졌고 큰 고기 배속에서 진실을 기도해서 다시 육지로 나오게 되었고 니느웨로 가서 진실을 전해서 백성들을 구원하게 되었으니 자기의 사명을 완수한 기쁨이 그동안의 고초를 말끔 잊어버리게 했을 것인데 자기의 본래의 사명은 생각 않고 자기의 현실의 위신 곧 “니느웨가 40일이 지나면 무너질 것이다”하고 큰소리로 외친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투덜거렸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니느웨가 40일 지나 망하겠다는 것인데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으면 요나의 위신에 아무 상관이 없건만 좁은 마음을 가진 인간은 이런 일에 곧 잘 비뚜러져서 진실을 떠나 이러한 짓을 내뿜는 것이다. 요나서에 기록된 박 넝쿨의 교훈은 정말 위대하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
속임수는 간교한 수단이다.
나는 성경 인물 가운데 위대한 인물로 등장한 야곱과 다윗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둘 다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그 업적은 크지만 한때의 그들의 속임수의 행동은 너무나 밉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시킴을 받아 속임수를 썻다. 하지만 아버지 이삭이 “네가 정말 에서냐?”하고 물었을 때 야곱이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한 것은 야곱을 진실에 사는 사람이라고 증명할 수 없는 뚜렸한 사실이다. 속임수를 써서 형 에서의 이름으로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동생 야곱이 샀다는 이야기는 좀 납득이 안가는 데가 있지만...야곱은 상술에 능한가 보다. 팔고 사는 장사 속에 빨랐었나 보다. 장사군은 속임수에 능해야 큰 이익을 본다. 야곱은 에서의 축복을 사기 전에 돈 몇푼 안 쓴 팥죽으로 굉장히 값나가는 장자의 명분을 샀다. 형 에서에게서 산 것이다.
배고파 죽을 지경에 이른 에서는 현실주의자 였나보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제일이다”하는 현실주의자 에서는 귀중한 자기의 장자의 명분이 아무것도 아니요 먹음직하게 보이는 팥죽이 제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회를 노리고 야곱이 팥죽을 쑤어 놓고 형 에서를 유혹했는지 우연한 기회에 이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형의 곤경을 이용한 야곱은 아무리 좋게 보아주더라도, 진실에 사는 사람은 아니요, 속임수에 능한 얄미운 사람으로 보인다.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고 그리스도의 조상이었으니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 인간으로서는 모르겠다.
그 후 에서는 세상을 되는대로 살았고 야곱은 회개하여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얍복 나루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하여 이겼다는 이야기는(창세기32:22-30) 야곱의 절대 진실성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진실에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씨름하셔서 져 주신다는 진리를 우리는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으로 힘과 기술이 무한해서 누구를 상대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인데 야곱에게 졌다는 것은 진 것이 아니라 져 준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다섯 살 먹은 아들과 씨름해서 져주는 것과 같다.

얍복 나루는 야곱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전환점이 있음을 알아서 진실을 떠났으면 진실을 되찾아야 한다.
진실을 찾은 야곱에게 어제까지의 속임수를 들 추어 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행사이다.

다윗왕의 경우를 고찰하면 그는 소년 시대에 열두 살 때에 불레셋 장군 골리았을 엘라 골짜기 싸움터에서 물팔매로 때려 눕히고 사울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사무엘하5:3-5) 한가지; 경우를 제하고는 진실에 사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어째서 그가 남녀 문제에 지저분했는지 이해 할 수 없다. 당시의 사회 제도가 일부 다처를 허용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다윗은 정신없는 호색가 였던것 같다. 결국 다윗은 큰 죄를 저질렀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속임수를 써서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어 죽게 하였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아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사무엘하11:27)이 성경구절은 한마디로 다윗을 평가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실을 떠난 이 불의의 관계의 씨는 하나님께서 쳐서 죽게 하시고 같은 바세바의 몸에서 유명한 솔로몬왕을 낳게 했다는 사실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예정이라는 운명을 인정히면 선악의 결과가 다 하나님의 뜻이요, 상벌이 있을 수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단을 보내시어 다윗을 일깨워 주셨다.
나단의 비유 이야기는 재미있다(사무엘하12:1-15) 다윗은 곧 회개했다.
회개는 진실로 돌아오는 길이다. 진실로 돌아온 다윗은 힘껏 진실에 살아 나라를 잘 다스렸다.
다윗은 시를 읊어 진실을 고백하는 시편 시인이 되었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눈가림도 거짓이요 속임수도 거짓이다.
사람들은 눈가림도 아니요 속임수도 아닌 거짓말을 곧잘 하는데 “천금보다 더 귀한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 무슨 말일까?

포수가 놓친 노루의 향방을 나무꾼에게 물었을 때 나무꾼은 노루가 간 방향을 대어주지 않고 반대 방향을 대었다. 그래서 노루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이런 거짓말을 “천금보다 더 귀한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을까?
이런 경우에 참 말을 해서 노루를 집혀 죽게하는 것이 진실에 사는 생활에 부합되는 것일까? 은 촛대들을 훔친 잔‘발잔이 경찰관에게 잡혀 미리엘승정에게 끌려 왔을 때 미리엘 승정은 “ 그 은촛대들은 그가 훔친 것이 아니라 내가 준 것이요”하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닌가?
이 거짓말은 “천금보다 더 귀한 거짓말”이라고 하겠다. 잔’발잔을 살렸으니 말이다.
미리엘 승정으로서는 마음으로 잔‘발잔에게 은촛대를 주었을 것이다. 준다는 말은 아니했어도 마음으로 주었으면 준 것이라고 말을 해도 좋다고 하겠지만 거짓말을 아니 했다고 할 수는 없다.

남을 위해서 하는 쓰라린 거짓말, 남을 살려주는 거짓말, 진정한 화목과 평화를 위한 거짓말-
이런 거짓말들을 진실에 사는 생활에서 어떻게 간주해야 하나?
알면서도 모른다고 해도 거짓말이요 침묵도 진실에 대한 하나의 거부하고 볼 때에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있는대로 모두 털어놓는 것이 진실인가?
진실에는 비밀이 없는 것인가?
자기 해명을 위한 거짓말은 야비한 거짓말이요, 남을 해치는 거짓말은 난폭한 거짓말이다. 용납할 수 없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게으를 수 없다.
부지런하다. 바쁘게 산다.
부지런하게, 바쁘게 살면, 게으름이 붙을 수 없고 즐거움이 뒤따라 행복을 누리게 된다.
게으른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게 되고 거듭되는 실패는 핑계를 몰아오고 핑계는 진실을 도피하는 것이다.
진실 도피는 죄악에로의 길이요 문이다. 게으르면 죄악의 길이 트이고 죄악의 문이 활짝 열린다. 게으른 사람에게 온갖 유혹이 오라고 손짓한다. 부지런한 사람, 바쁜 사람은 유혹의 손짓을 볼 사이가 없다. 게으른 사람은 선한 일을 할 사이가 없게 무사분주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시간을 쪼개어 쓰면서 선할 일을 할 사이를 만드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 할 일을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게으른 편이요 몹시 바쁘면서도 할 일을 다하는 사람은 부지런한 편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에게라고 25시간이 주어 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24시간 이건만 시간이 진실에 편이 되어 준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아첨할 줄 모른다.
아부하지 않는다.
권세에 들러붙는 것이 아첨이다. 덮어 놓고 부강에 편등는 것이 아부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 권세를 차지한 사람, 부요한 사람, 강한 사람 - 이런 사람들은 제 멋대로 살려고 하므로 무리한 생활을 하러드는 때가 많다. 지위가 낮은 대다수의 평민을 손아귀애 넣으려하고 권세가 없는 선량한 자유민들을 마음대로 부리려하고 빈궁에 허덕이는 수 많은 세궁민들을 착취하려들고 물결 따라 바람부는 대로 사는 약소민들을 짓 누르려한다. 극소수의 그들이 절대다수의 민중을 지배할 수 없음이 정리인데 절대다수의 민중 가운데서 동료를 배반하는 반역자들이 배출해서 극소수의 그들을 소원 성취하게 한다.
이 반역자가 곧 아첨군이요 아부자이다.
진실을 떠난 아첨군들만 없다면 세상은 자유롭고 평등 할 것이다.
아첨에 부수되는 것이 뇌물이다. 뇌물 주고받기를 정당한 행위로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뇌물 주고받기가 횡행한다. 뇌물은 아첨이라기 보다 낚시밥이라고 말하기도 하리라.
그러나 아첨의 표시인 것만은 확실하다.
잘 보이게 하기 위하여, 잘 얻어 갖기 위하여, 뇌물을 보낸다.
일단 뇌물을 받으면 마음이 달라진다. 변한다. 진실을 잃게 된다.
뇌물은 눈과 입을 닫게하고 진실을 사슬에 매어 두는 것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아첨과 뇌물을 모른다 그래서 받는 손해가 적지 않지마는 그 손해는 육적 물적 손해 뿐으로 영적 심적으로는 결코 손해를 보지 않는다. 오히려 큰 소득이 있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건방지지 않다.
거드럭 거리지 않고 거만하지 않다.
인권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마는 진실에 사는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진실에 사는 사람에게 자존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자존심과 자만심은 완전히 다르다. 자기의 도가 넘치게 구는 것이 건방짐이다.
건방지면 거드럭거리게 마련이다.
속이 비어야 거만이 나온다. 속이 찼는데 교만 할 수는 없다.
속이 차면 진실하게 되고 속이 비면 자연히 바람이 들어 진실하지 못하게 된다.
남을 없신 여기는 것이 거만인데 거만은 무지와 폭행을 낳는다.

세계 역사를 들추어 볼 때 독재 폭군은 모두 건방진 사람들이었다.
나폴레옹이 이런 건방진 말을 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 불가능이 없다던 나폴레옹의 최후는 어떠했나? 참으로 불행했다. 그가 건방지지 않고 그의 능력을 세계 평화에 이바지 했더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늘에 해가 하나이듯이 땅에 해가 둘이 있을 수 있는가?”하고 건방진 소리를 한 독일의 히틀러는 괴연 세계를 휩 쓰는것 같았으나 진실은 인간 세계를 외면하지 않는다. 건방진 사람이 최후 승리를 거둔 일이 역사에 있는가? 없다.

학식이 많은 사람은 건방지지 않다. 학식이 없어야 아는체 하는데 아는 체하는 것이 건방짐에 속한다.
수양을 많이 쌓은 교양있는 사람은 건방지지 않다. 교양은 진실을 배워주기 때문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공포를 모른다.
두려워 하지 않고 무서워 하지 않는다. 근심 걱정을 초월한다.
인간은 언제나 공포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몇 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무어니 무어니해도 죄악에 관련된 죽음과 심판에 대한 공포가 가장 큰 공포이다.
“내가 이런 무시무시한 죄를 짓고 무슨 벌을 받을 것인가?”하는 공포, 이것이 양심의 채찍질이다.

인간의 세상살이에 공포는 많다. 인간의 공통 공포에 대하여 예수는 분명히 지적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서 자나? 염려하지 말아라” 의식주에 대한 공포를 안 가진 사람도 있을까? 이것을 알으셨기 때문에 예수는 의식주에 대한 공포를 버리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실에 살면 의식주에 대한 공포는 없다는 말씀이다.
과연 그런가?
육적 물적인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씀이요 심적 영적인 사람에게는 진실이다.
인간 세계는 도박장이니 연극무대니 이런 저런 말이 있으나 나는 인간 세계는 공포의 도가니에다가 비하고 싶다.
세상에 가장 널리 편안한 공포는 가난에 대한 공포이다.
부의 편재 때문에 생기는 가난, 집권층과 재벌의 짝짝꿍으로 인하여 생기는 가난, 죄없이 허물없이 까닭없이 당하는 대중의 가난, 가난이 의식주의 공포를 빚어내고 가난이 인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가 되게하는 것이다.
절대다수의 인간이 왜 가난에 허덕이는가?
왜 가난의 공포속에서 비극을 연출 하는가?
가난의 공포만 없어진다면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지고 웃음꽃이 만발 할 것 같다.
예수께서 젊은 부자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가난의 공포에 대한 책임자는 부자들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남을 공포에 몰아 넣고 배불리, 뜨듯이 편하게 살 수 없다.
세상에ㅡ제일 흔한 공포가 가난이라면 제일 큰 공포는 죽음이다.
“죽으면 어떻하나?”- 죽기를 무서워 하는 외침이다. 극소수의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염려한다고 목숨을 연장시키지는 못하지만 죽음을 염려하는 것이 보통 인간의 상정인가 보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현실에 최선을 다허며 만족을 느끼므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 괴롭다 면서 죽기를 싫어하는 인간- 모순이다. 인간은 모순 덩어리이긴 하지마는....
인간 중에 무조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선한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음이 연장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없지 않다. 후자는 죽음을 무서워한다고 할 수 없다.

진실에 사는 사람에게는 가난의 공포도 죽음의 공포도 없다.
진실에 사는 삶은 감정과 욕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감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성으로 감정을 누르고 말씀으로 욕심을 누를 때에 진실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성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인간의 얕은 지혜가 아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 곧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성경의 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성경의 속 뜻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감정이나 욕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욕심을 누르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요 진실이다. 인간은 날과 때, 아니, 분과 초로 감정과 이성, 욕심과 진심의 싸움으로 세월을 보낸다. 이 사실만은 백 퍼센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이상 감정과 이성의 싸움, 욕심과 진심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다.
요단 광야에서의 사탄과의 싸움은 욕심과 진심의 싸움이었고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피 땀 바위 싸움은 감정과 이성의 싸움이었다. 물론 진심과 이성이 승리를 거두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가 스승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사실은 베드로의 감정과 욕심이 이성과 진심보다 강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베드로는 성미가 급했다. 성미 급한 사람은 쉽게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베드로가 예수를 보호한다고 검을 빼서 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쳐 떨어뜨린 것은 하나의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성미 급한 것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성미가 급해서 남보다 좋은 일을 먼저 해 내는 수가 많다.
감정과 욕심에 얽히어 완전히 이성과 진심을 잃고 아니할 짓을 한 사람은 예수의 제자 가리옷 유다이다.
그가 스승 예수를 배반한데 대하여 그 진의는 애국 광복이라는 충정에 입었다고 변호하는 이들이 많다. 이 변호를 시인하자.
그러나 가리옷 유다의 애국 광복은 세상적이었고 감정과 욕심에 속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 지상 건설이 자기의 사명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 나는 일찍이 이런 생각을 가진바 있었다.
세계는 홍수나 유황불로 모두 멸망 당하여야 한다고...
왜냐? 세계인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죄악을 짓고 있으니까...

제 나라를 빼앗기고 사는 민족은 못난 민족이요 남의 나라를 빼앗아 가지고 흥청거리는 민족은 사나운 죄인이요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는 민족을 도와주지도 못하고 말리지도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민족은 무관심한 죄인이다.
위의 세 범주에 속하지 않는 민족은 없다.
그러니까 모두 멸망 당해야 한다.
제 나라 하나를 간직하지 못하는 주제에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건설한다는 말인가?
남의 나라를 집적거리면서 무슨 염치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느니 마느니 지절 거릴 수 있는가?
선악간에 무관심한 터에 하나님의 나라가 아랑곳 있는가?

나는 이렇게 세상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곧잘 혼동했다.
옛날의 예수의 제자들 처럼. 사도 바울은 묘한 고백을 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고 있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 (로마서7:15,19)
감정과 이성의 싸움, 욕심과 진심의 싸움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진심은 양심 혹은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해도 좋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감싸 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자”(마가14“38) 이성은 하자는데 감성은 마자하고 양심은 하자는데 묙심은 마자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은 선한 일을 하자는데 육신은 마자고 한다. 귀찮아서 바빠서, 불리해서, 어려워서, 너무 힘들어서, 이주 피곤해서 마자는 것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감정과 욕심을 누르고 이성과 진심의 명령에 복종한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주고 받기, 받고 주기에 원만한 사람이다.
주고 받기, 받고 주기는 진실성 여하에 그 값이 정해진다.
주고 받기 사회가 무질서할때에, 받고 주기 사회가 빈약할 때에, 주고 받기 받고 주기 사회가 불균형을 이룰 때에 세상은 혼돈에 빠지는 것이다. 혼돈은 하나님의 창조이전상태이다. 보상, 보수, 보복, 응보, 응수- 대개 갚음의 뜻이다.
은혜 받기는 보은이요, 원수 갚기는 복수 또는 앙갚음이다.
복수에는 열을 올리지마는 보은에는 땀을 식히는 것이 인간의 상정인것 같다.
은혜를 입고 신세를 지고 폐를 끼쳤을 당시에는 평생 그 은혜, 그 신세, 그 폐를 잊지 않을 것 같고 갚고야 말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르는 대로 흐려지다가 망각의 보따리 속에 집어 넣고 만다. 그런데 손해를 입고 굴욕을 보고 망신을 당하면 그예 갚고야 마는 것이 인간의 못남이다.
은혜는 갚아야 시원하고 원수진 것은 잊어야 홀가분하다.
주고 받기, 받고 주기는 자연히 되어지는 것인데 되는 대로 맡겨버리면 그만이다하는 생각을 가지면 안된다.
준다고 무엇이든지 받아도 안되고 받았다고 무엇이든지 주어도 안된다. 주어도 받을 것을, 받아도 줄것을 잘 가려야한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 ‘거져“는 ”값을 치르지 않았다“의 뜻이다.
우리는 거져 받은 것이 너무 많다. 해, 달, 별, 공기, 물을 비롯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거져 받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거져 받은 것이 돈 치르고 받은 것보다 훨씬 값비싸지마는 우리는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거저 받은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을 거져 받았고, 부모에게서 양육을 거져 받았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는가?

인간이 세상에 무엇하러 왔나?하는 의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해소 되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았고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태20:28)
그리스도는 주러 세상에 오셨다. 주되 목숨까지 주러 오셨다. 이 한 말씀으로 인생의 사명을 밝히셨다, 우리는 주러 세상에 왔다, 세계인구의 절대다수가 허덕이는 셍활을 하다가 가버리는것을 보면 정말 인생에 의문이 짙다. 이 절대다수를 그리스도는 보잘 것 없는 존재로 표현하시면서도 그들 하나에게 행한 것이 자기에게 행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 존재가치를 높이 평가하셨다. 영적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라사로보다 호강하고 산 부부가 더 불쌍하다.
예수께서도 보수적인 말씀을 꽤 많이 하셨다 금언으로 알려진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을 하라”(마태7:12)는 그 대표이다. 인과응보는 자연 법칙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렇다고 갚아주시기를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은 진실에 사는 것이 못 된다. 우리더러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말라,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 빰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거든 것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라거든 십리를 가주고 원수를 사랑하라”(마태5:39-41, 44)고 권장하신 예수께서 신실한 종과 신실하지 못한 종의 보상을 말씀하셨다(마태24:45-51) 어떻게 보면 보상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모순된다. 성경 말씀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도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따진다든지 경고와 선고를 혼동하면 모순을 일으킨다.
알곡은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태워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인데 하나님이 가라지를 미워서 태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 자신이 태워버려지게 된 것이다. 가라지가 가라지 되고 싶어서 가라지가 되었느냐고 반문 할 수가 있다.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져 낼 수 없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을 더 생각하시고 더 사랑하신다는 예수의 증언을 우리는 믿을 뿐이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마태7:7) 이 진리는 인간 생활에ㅡ가장 널리 적용된다고 나는 믿는다.

실용적인 문제로 무엇보다도 남녀 문제에 들어가 구혼에 이 진리를 적용하라고 나는 젊은이들에게 권한다. 체면과 위신 때문에 구혼을 하지않고 좋은 신랑을, 좋은 신부를 놓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여성 형제가 한 남성을 교제하는데 형제가 그 남성을 좋아한다.
남성은 아우보다 형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아우는 적극적이요 형은 소극적이다.
남성은 형이 구혼해 오기를 은근히 고대했다. 형은 젊잖음만 빼고 마음으로는 원하면서 구혼을 않는다. 아우는 덤벼들어 구혼한다. 남성이 아우와 약혼한 후에 형의 의사를 알게 된다. 때는 늦었다.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다. 형이나 남성이나 마찬가지로 구할 줄을 몰라서 행복을 외면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미쩌도 본전”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구혼의 경우에는 미쩌도 본전이건만 구혼의 실패를 미찐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구혼 했다가 실패하면 깨끗이 단념할 뿐이다. 부모 자식사이에도 구하는 부모나 구하는 자식이 이익을 보고 구하지 않는 부모나 구하지 않는 자식이 손헤를 보건만 여기에는 천성이 문제되는것 같다. 이득과 손실을 뻔히 내다 보면서도 천성대로 사는 것이 인간이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그렇고 형제 자매사이에도 그렇고 친구 사이에도 그렇다. 철없는 아기 처럼 주어지면 안되는 것까지 구해서는 안 된다. 울고 떼를 쓰고 보채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도 그렇다.
아기로서는 구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부모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구할 때 주어지지 않아서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하고 야속하게 생각하는가?
“구하라 주실 것이요”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성경 말씀의 오해는 미신 이상의 어리석음을 빚어내는 것이다.
줄 수 있는 것을 자식이 원하는데 안주는 부모는 없다.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주기를 아까와 하고 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 인간의 통정인 것이다.
물론 예외가 있다. 주려거든 머뭇거리지 말고 선뜻 주어라. 즐겁게 주라. 받는 사람이 불쾌감을 일으키도록 주는 것은 안주는 것만 못하다. 받기 문제가 주기 문제보다 수월한 것이 아니다. 주는대로 냉큼 받았다가 큰 코 다치는 수가 많다. 받는 것이 받을 수 있는 것인가 깊히 검토해야 한다.
불순한 저의가 숨어 있으면 탈이다.
사람은 받으면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이다. 억지로 안겨 준다고 마지 못해 받아도 한번 받는 이상 마음은 쏠리는 것이다. 교활한 사람들은 우선 주기부터 한다. 우선 상투 수단이다. 안 받을 것을 받아가지고 그물에 걸려 애쓰는 미련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안 받고 주위의 사람들을 섭섭하게 만드는 괴팍장이도 걱정이다. 우리가 안 받고 세상에 살 수는 없다. 청백하다는 것은 안 받을 것을 안 받는 행위를 말한 것이지 선인의 호의까지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받으면 주게 마련이다. 그런데 주고받기, 받고 주기를 물질에 치중하거나 얽메여서는 안 된다.
받고 줄 능력이 없어서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마음을 주는 것, 사람을 주는 것이 더 잘 주는 것이요 더 많이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말이 그렇지 실제에 있어서 빈손으로 상대를 대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아예 가야 할 데를 안가고 찾아갈 사람을 안 찾고 할 일을 못하고 만다. 내 자녀들은 물질 주고 받기, 받고 주기에 마음 쓰지 말고, 마음과 애정 주기 받기, 받고 주기에 힘쓰기 바란다. 잘 주고 잘 받기, 잘 받고 잘 주기의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요 진실에 사는 사회이다.
주고받기, 받고주기 문제로 우리 한국 가정을 살펴보자.
오늘의 가장과 주부는 과도기에 처해 있다. 부모에게는 갚고 자녀에게는 주기만 해야 우리의 가정이 바로 잡힐 것이다. 한가정이 친자 본위냐 부부본위냐 하는 문제는 옛날 이야기이다. 부부 본위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오늘의 가장과 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을 갚아야 한다. 부모님이 갚기를 기대하시니까 말이다. 그리고 자녀에게는 줄 수 밖에 없다. 양육의 의무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녀에게서 받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손익 관계를 말한다면 손해만 보라는 말이다. 오늘의 가장과 주부가 이런 결심을하고 양육 받은 자녀로 하여금 갚지는 않고 주게만 만든다면 내일의 우리 한국 가정은 바로 잡힐 것이다. 오늘의 가장과 주부가 내일의 가장과 주부를 위하여 희생하라는 말이다. 희생은 받기를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하는 미덕으로 완전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우리에게 주신 사랑.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 이 사랑이 희생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줄 것을 다주었다.(누가10:30-37) 시간을 주고, 정력을 주고, 물질을 주고, 마음을 주었다. 받기를 기대하고 준 것이 아니다, 그저 거져 준 것이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받았다. 기대 이상의 큰 것을 받았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은 것이다.
나 보다 약한 자, 가난한 자, 모르는 자, 불쌍한 자를 위하여 시간을 주고, 정력을 주고, 물질을 주고, 마음을 주자. 하나님의 나라가 땅위에 임할 것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울며 세상을 살지 않고 웃으며 세상을 산다.
인간이 울려 들면 울거리가 무한하고 웃으려 들면 웃을 거리가 또한 무한하다. 하나님이 울러 드셨다면 울다가 아무것도 못하셨을 것이요, 예수가 울러 드셨더면 그의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도 우시고 예수도 우셨다. 당신이 애써 창조하신 인간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이, 죄를 졌을 때 어찌 울지 않으셨을까?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후회하시고 울으셨을지도 모른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왜 착하게만 살게 못하시고 악을 행하게 눈을 감아 두시느냐고 사람들은 곧 잘 의문을 일으킨다.
하나님이 선악의 자유를 인간에게 주시지 않았더면 세상이 어떠할까? 인간이 기계 노릇을 하고 싶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기계도 고장이 생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 위에 슬기를 주신다. 인간의 슬기 말고 하나님의 슬기 말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무엇이든지 임금 노릇하기에 필요한 하나만을 구하라고 하셨다.
솔로몬왕은 지혜를 구했다. 정말 지혜로운 임금이다. 솔로몬은 그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리고 지혜의 말씀을 발표했으니 그것이 성경의 잠언이다.
잠언 1:2-6을 보면 잠언의 목적이 쓰여 있다.
29장 27절 까지의 솔로몬의 잠언은 숙독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날 더러 한가지의 소원만 말하리고 하시면 나도 지혜를 구할까? 아마 절대 다수는 돈을 구할 것이다.
인간의 지혜는 돈을 잘 벌고 권리를 잘 얻고 명예를 잘 날리고 지위를 잘 높이는 안일을 잘 누리는데 이용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살리는데만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가지로 기지라는 것이 있다.
재치라고 할까? 기지는 특별한 은총이다.
사람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을 빨리 생각해내게 해주는 것이 기지이다.
기지는 어려운 문제 해결에 크게 도움을 준다. 요사이 요령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진짜 요령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하고 사람들에게 쾌감을 주지만 가짜 요령이랄가 군대에서 쓰는 요령은 그것도 지혜에 속하기는 하나 환영할 만한 것이 못된다.

나는 지식을 학교에서, 일반 사회에서 얻었고 지혜를 말씀에서 얻었다.
말씀에 하나님의 지혜는 무진장하다. 하나님의 지혜는 결국 진실이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지혜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하신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날더러 한가지의 소원만을 말하라고 하시면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지혜인 진실을 나는 구할 수 밖에 없다.

진실 곧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 모든 필요한 것이 뒤딸아 올 것이다. 예수의 약속대로 말이다.(마태6:35)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면 사람의 지혜는 육의 일에 몰두하게 만드는데 육의 일은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기, 싸움, 시기, 분노, 당파심, 분열, 분파, 질투, 술주정, 연락 따위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런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찾이하지 못할 것이라고 엄숙히 선언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데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라고 지적했다. 사도 바울이 현대인이라면 그 표현 방법이 달랐겠지만 내용은 같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의 지혜는 육체적, 물질적 이득과 향락으로 머리를 쓰고 손을 벌리고 발을 달리게하고 하나님의 지혜는 정신적, 영적 소득과 즐거움으로 마음을 쓰고, 정신을 쏠리고, 몸을 바치게하는 것이다(갈라디아5:19-23)

요사이 잘 들 쓰는 말이 잇다. “좋은 것이 좋지 않소?” 좋은 것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좋아하셨다(창세기1:4.10.12.18. 21. 25.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1:31)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런데 요사이 말하는 “좋은 것이 좋지 않소?”하는 말은 딴 뜻이 있다.
“좋지 않더라도 여러 사람이 좋아하니 좋도록 합시다”하는 불진실이다.
“그져 좋도록 합시다!” “당신 혼자 진실을 찾아야 무슨 소용이 있소?”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서 좋은 것을 좋아한다.
좋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편을 보며 세상을 살랴고 한다. 나쁜 편에는 눈을 감는다. 귀를 막는다. 입을 닫는다. 팔을 세운다. 손을 묶어 버린다.
나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쁜편을 보며, 세상을 살려고 한다. 신문은 좋은 편 보다는 나쁜 편을 대서 특필한다. 그래야 신문이 팔린다는 것이다. 나쁜 편의 기사가 많을 수록 클 수록 잘 팔린다는 것이다.
인간이 왜 이래졌을까?
천에 하나 아니 만에 하나가 될까 말까한 한 사람이 정신분열자가 있어 그가 큰 일을 저지르면 그가 피스톨로 까닭없는 여대생 50명을 살상시켰다면 이 사실이 신문에 나고 , 라디오가 떠들고, 텔레비전이 야단이고, 사회학자들이 모이고 세상이 들썩 거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신분열을 일으킨 좋지 못한 군인들이 총을 가지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비극을 저지르는데 사건이 생기면 꼭 신문에, 라디오에, 텔레비전에 커다란 화제가 되고 한동안 떠들섞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형제가 칼부림을 하고 연애하는 남녀가 독약을 먹고 이런따위는 모두 비정상적인 것이어서 쳐들 필요도 없는 사건들이 건만 성당에서 교회에서 신부나 목사들이 설겨재료로 쓰고 연단에서 웅변가들이 연설 재료로 쓴다. 그렇게 할 말이 없는가? 상식 부족 때문일까? 정신분열자의 서행을 일반인의 행동처럼 분개하고 화제삼는것을 보면 화제 삼는 이들의 정신이 의아하다.
여하간 좋은 것을 좋아해야할 인간이 나쁜것을 좋아하는 수가 많은데 왜 그럴까? 장마가 졌다. 홍수가 났다. 강물이 불었다. 강물이 넘친다. 집채가 떠 내려 온다. 소가 떠 내려온다. 산사람도 시체로 떠 내려온다. 이것들은 좋은 광경이 아니다. 분명히 불행한 나쁜 광경이다. 그런데 구경꾼들이 모인다. 남의 불행을 덜어주려는 일꾼이 간혹 있지마는 대게는 구경을 목적한 순 구경꾼들이다.
떠내려오는 것들이 많을 때에는 구경 나온 행위를 흡족하게 여기고, 떠내려오는 것들이 적을 때에는 섭섭해하고 떠내려오는 것들이 없을 때에는 “공연히 왔군”하고 후회한다. 인간 도덕으로 생각할 때 기막힌 노릇이다. 불이 났다. 집이 탄다.. 불속에서 사람 살려 달라는 소리가 난다. 소방차가 달려온다. 헬리콮터가 날아 온다. 불꽃이 충천한다.
이것은 좋은 광경이 아니다. 분명히 불행한 나쁜 광경이다.
그런데 구경꾼들이 모인다. 구경꾼들의 목적은 구경이다. 불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이 활활 탈 수록 구경꾼들은 열심히 지켜보고 불이 다 꺼지면 볼 것이 없어졌다고 흩어져 간다. 불의 경우가 물의 경우와 거의 같다.
운동 경기장에 가서 선수들의 묘기를 볼 때에 관객들이 손뼉을 쳐 주는 것은 분명히 좋은 것을 좋아 하는 증거이다.
그런데 권투 경기에 있어서 때리고 맞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는데 때린다고 치는 것인지 맞는다고 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리고 KO 펀치가 일어나야 관객들이 쾌감을 느낀다. 관객 가운데에는 세파가 있다. 응원파, 적대파, 중립파인데 응원파는 자기편 선수가 적대편 선수를 KO 시켜야 좋아하고 적대파는 반대편 선수가 KO 당해야 좋아하고 중립파는 어쨌던 하나가 하나를 KO 시켜야 구경 값 치른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겅우에 사람들이 좋은 것을 좋아하는지 나쁜 것을 좋아하는지 평정할 수가 없다. 좋은 것이 주관적이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러나 좋은 것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항상 발전하는 다양성 세계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하나를 사람들이 똑같이 좋아하고 똑같이 싫어 했다가는 큰일이다.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창조의 조화는 기기묘묘하다.

나는 웃으며 세상을 살려고 애썼고 좋은 편을 보며 세상을 살려고 힘썼다.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내 얼굴에 늘 미소가 남아 있기를 나는 바랐고 내 행위에 늘 미덕이 끼쳐 지기를 나는 바랐다. 웃는 얼굴 아름다운 행위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어 비로서 동포애를 느끼게 되었다. 생각이 든 것이다.
철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사도행전7:23) 좋은 것이 무었인지 알게 된 것이다. 좋은 것을 안 모세는 좋은 것을 찾았고 좋은 것을 만들었고 좋은 것을 이루었다. 좋은 것이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아야 하고 좋은 것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들어 내야 하고 좋은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루어 놓아야 한다.
이러기에는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 없이 되는 것도 있는가? “호박이 굴러 떨어졌다” “땡 땄다” “이게 왠 떡이냐?” - 남의 노력의 대가를 내가 받은 것 뿐이다. 그러니까 결국 “노력이 좋은 것을 낳는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 노력없이 좋은 것은 없다. 좋은 것을 좋아하는 것도 노력이다. 그렇다면 나쁜 것을 좋아하는 것은 방탕이다. 사실 방탕은 바쁜데 속한다.
내 나이 몇인가? 철이 들었나?
모세가 40세에 철이 들었다니 늦게도 들었구나! 그런데 내가 70인데도 철이 들지 않았다면 철이 든것인가? 관속에서 철이 드는 수도 있는가? 철이 들게하는 것은 사고력이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고 없이 철은 들지 않는다. 70에도 먹을 것에만 눈이 뻘겋다면 철이 들겠는가? 70에도 유행 옷에 돈 지감을 말린다면 철이 들겠는가? 70에도 한옥 양옥을 찾아 헤멘다면 철이 들겠는가? 70에도 갈대를 면하지 못한다면 철이 들겠는가? 철든 사람은 좋은 것을 좋아할 줄 안다. 따라서 나쁜것을 싫어할 줄 안다.

세상에 귀신이 있는 것인가? 귀신도 무형하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없다.
보았다면 형형색색이다. 유령, 도깨비가 귀신의 다른 이름이다. 마귀, 악마, 악귀, 악령, 악신, 신령 등이 모두 귀신의 별칭이다. 사단이나 사탄도 물론 귀신이다.
그런데 귀신은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은 아닌가? 물귀신, 나무귀신, 다리귀신, 달걀귀신 같은 것들은 나쁜 귀신인 모양이요 산신령은 복도 주는 귀신 같고 유령이나 도깨비는 나쁘기도하고 좋기도 한 것 같다. 사탄은 우리말의 마귀와 통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왜 귀신을 만드셨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나쁜것은 귀신의 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쁜것을 좋아하는 것은 귀신의 조화 때문이라고 하겠다. 선과 악이 하나님과 귀신의 관련사라면 진실과 거짓이 하나님과 귀신의 관련사요 아름다움과 추함이 하나님과 귀신의 관련사이다. 사랑과 미움 평화와 전쟁 복과 화 희망과 절망 믿음과 불신 기쁨과 슬픔 번영과 쇠퇴등이 하나님과 귀신의 관련사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신 신(神) 이라고 유일신을 주장하는 기독교가 귀신을 인정하고 있다.
이율 배반적인것 같다. 하나님도 귀신을 인정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도 귀신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따로 계신것 처럼 귀신이 따로 있는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난 귀신은 뱀이었고 욥앞에 등장한 사단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민족 이었고 예수를 시험한 마귀는 성령의 상대가 되는 존재였고 예수께서 고쳐주신 귀신들린 사람들은 영혼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감정의 지배를 받았을 때에 사탄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내가 내게 사탄이 되고 남에게 사탄이 될지 모른다. 나쁜 사람이 곧 사탄이요 나쁜것이 곧 사탄의 일이라면 나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탄이다.
나쁜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탄이요 좋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 곧 천사라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가 되었다가 사탄이 되고 사탄이 되었다가 천사가 되는가 보다.

세상에는 울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징징 울고 훌쩍훌쩍 울고 엉엉 울고....
세상을 비관하고 울며사는 사람도 있지마는 버릇이 되어 공연히 울고 사는 사람도 있다. 돈을 금고에 넣어 두고도 돈이 없다고 징징 우는 사람이 있다.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는다고 징징 우는 사람도 있다. 영감이 밤 늦게 돌아 온다고 징징 우는 사람도 있다. 자식이 공부를 잘 못한다고 징징 우는 사람, 딸의 시집살이가 너무 되다고 징징 우는 사람, 아들이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징징 우는 사람, 사회가 부정 부패에 차 있다고 징징 우는 사람, 정치가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징징 우는 사람, 재판이 무슨 노름같다고 징징 우는 사람, 교회가 파당싸움으로 제 구실을 못하고 지탄을 받고 있다고 징징 우는 사람-- 징징 우는 사람으로 세상은 차 있다. 우는 사람의 수효가 많을 수록 사회의 발전은 더디다.
훌쩍훌쩍 우는 사람들은 슬픔에 싸인 사람들로써 슬픔의 울타리를 치고 이웃과 왕래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스스로 외로운 세상을 만들고 사회의 발전을 저해한다. 엉엉 우는 사람들은 울음이 그칠 소망이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환점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엉엉 실 껏 울다가 지쳐서 스스로 울음을 그치고 웃으며 세상을 살려고 할 것이다. 울고 싶을 때에는 우는 것이 유일한 약이다.
웃으며 세상을 산다는 것은 행복한 생활이다. 징징우는 대신 생글 생글 웃으며 세상을 살면 자신은 좋거니와 주위를 좋게 해준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남을 즐겁게 해 주는 일에 힘을 쓰기 때문이다. 웃으며 세상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다.
물론 실없이 웃는 것과 생글 생글 웃는 것 과는 다르다. 실실 실없이 웃는 웃음은 진실에서 벗어난 웃음이다. 그리고 울음보다 웃음의 종류가 훨씬 더 많은데 너털웃음, 간들웃음 해푼웃음 진짜웃음 가짜웃음 애교웃음 빈정웃음-- 웃음의 소리난 형용이 웃음을 정의한다.
진실한 웃음은 남을 즐겁게 해주고 불진실한 웃음은 남을 도리어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리 없는 웃음 미소로 고난과 비통을 이겨내며 세상을 살자. 늙음이 더디오고 젊음이 더디가서 건강 장수의 복도누리고 남에게 위안과 희열을 주어 생명 연장의 복도 끼칠 것이다. 웃으며 세상을 살면 악마는 도망가고 천사는 수종 든다. 악마는 진실에 사는 사람의 웃음을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악마의 수단 방법이 먹혀들어 가지를 않기 때문이다. 진실한 웃음은 악마를 물리치는 최강의 무기이다.
“소문 만복래(笑門萬福來)-- 웃는 문에 만복이 온다”는 격언이다.
“일소 일소(一笑一少)-- 한번 웃음에 한번 젊어진다”는 격언은 진실이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라는 속담도 진리이다. 상대가 웃음으로 대하는데 화를 낼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신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했다.(데살로니가전서5:16)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간권했다.(빌립보서4:4) “항상 기뻐하라”는 “늘 웃으며 살아라”는 말과 같다. 늘 웃으며 세상을 사는 사람은 가정에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 웃음으로 모든 부족을 감싸주기 때문이다. 웃으며 세상을 사는 시어머니는 실수를 덮어주고 며느리의 부족을 자기의 탓으로 돌린다. 웃으며 세상을 사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책망을 달갑게 받아 들인다. 그래서 그 책망을 다시 받지 않도록 힘쓴다. 웃으며 세상을 사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자기의 탓으로 돌린다.
여기에 평화가 깃드는 것이다. 늘 웃으며 사는 부모가 일 저지른 자녀를 집에서 내어 쫒을 수 있을까?
타이르고 달래고 새 약속을 하고 스스로 고치도록 온갖 노력을 할 것이다. 부모의 얼굴의 무서움이 권위가 아니다. 웃음이 무서운 권위이다. 학교에서 웃으며 세상을 사는 선생은 학생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인기와 인망이 대단하다. 그의 웃음은 열마디 책하는 말보다 더 권위가 있다. 말 많은 잔소리는 자나가는 바람소리요 말없는 미소는 값진 충고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웃음이라는 선물을 주신 것은 큰 은총이다. 이 은총은 선용하면 선용할 수록 늘어난다.

가짜가 세상에 횡행하고 가짜가 세상을 휩쓴다. 가짜가 판을 치는 이 세대에서 “진실에 산다”는 잠꼬대 같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잠꼬대는 아니다. 현실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를 따라오라”하신 것은 당신 처럼 진실에 사람이 되라 시는 것이요 “사람을 낚는 어부”는 사람을 낚아 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진실에 산다”는 내 인격 도야가 목적이 아니요 인간 구원의 목적임을 알아야 한다.
내 생활이 인간 구원에 한 대의 주사 노릇을 한다면 나는 만족하다. 진실에 사는 쓰라림이 남의 아픔을 덮어 줄 수 있다면 그 쓰라림은 값진 보물이다. 나는 그 보물을 소유하고 싶다.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군의 일이다. 일군은 주인의 일을 해야 한다. 일군이 주인에게서 품삯을 받으면서 자기의 일을 하면 좋은 일군이 아니요 심하게 말하면 도독이다. 가짜 일군이다. 주인의 일을 망치는 나쁜 일군이다.
하나님의 일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얼마든지 있는가 보다. 포도원 비유는 정말 재미있고 교훈을 준다. 하나님은 당신의 포도원에 일군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군을 부르신다. 새벽에도 아침에도 대낮에도 오후에도 저녁때에도 부르신다.
품삯은 후하게 주신다. 일군은 포도원에서 진실하게 일을 한 것 뿐이다. 자기의 품삯을 적당히 받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일군의 심리는 그렇지 않다. 자기에게 보다 품삯이 덜 가면 불평을 않지만 더 가면 불평이다. 이 생각은 버려야 한다. 진실에서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진실에 사는 일군은 정한 품삯으로 만족한다.(마태20:1-18)
아버지의 포도원에는 일이 많다. 그래서 아들에게 당부한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그런데 아들들은 아버지의 포도원 일보다 자기네 오락이 더 바쁘다. 마음이 더 쏠린다. 그러나 일군이 아니요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을 안도와 드릴 수 없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당부를 받고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가서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대답만 잘하고 일하러 가지 않았다. 무엇을 하느라고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진실을 저버렸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당부를 받고 아버지의 체면을 돌보지 않고 일하러 갈 수 없다고 즉석에서 거부했다. 그런데 자기의 오락을 찾아가다가 아버지의 포도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실을 되찾은 것이다. 나는 맏아들도 얼마 후에 아버지의 포도원으로 발길을 돌란 줄 믿는다(마태21:28-31)

돈 많은 재산가가 있었다.(자본을 나눠주고 활용할 것을 부탁했다) 그는 여행길을 나서며 종들을 불러 그 힘에 맞도록 자본을 나눠주고 활용할 것을 부탁했다. 얼마 후에 그가 돌아와 보니 50만원 받았던 종은 50만원을 벌어 100만원을 만들었고 20만원을 받은 종은 20만원을 벌어 40만원을 만들었는데 ( 40만원, 30만원, 받았던 종도 있었을 것이다) 10만원 받았던 종은 고스란히 10만원을 고대로 가지고 있다. 주인은 두 종을 칭찬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작은 일에 신실했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의 기쁨을 함께 누리자”. 그러나 10만원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하고 책망과 저주를 퍼부었다.(마태25:14-30) 도무지 일을 아니한 까닭이다.

위와 비슷한 이야기 이다. 귀족 한 사람이 있었다. 왕위를 얻으려고 그는 먼 나라로 떠나며 종 열을 불러 똑같이 한 종에게 100만원씩 나눠주고 활용할 것을 부탁했다.
재간이 있건 없건 튼튼하건 약하건 지식이 많건 적건 한 사람에게 100만원씩 골고루 맡겼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하느님은 재산가 처럼 등차가 있어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것도 있고 귀족 처럼 등차가 없게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것도 잇다. 학력, 금력, 재력, 체력등은 등차가 있지마는 (그것도 노력 여하로 등차를 줄일 수 있다.) 자연, 시간, 정력등은 등차가 없어(이것은 노력 여하로 등차를 만든다) 귀족은 왕위를 얻어 가지고 왔다. 열 종은 보고 햇다. 활동 한 대로 보고한 것이다. 하나는 100만원을 가지고 1000만원을 만들었고 하나는 100만원을 가지고 500만원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당초에 가진 100만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 이 이야기도 체계있게 꾸민다면 100만원으로 900만원, 800만원, 700만원, 600만원, 400만원, 300만원, 200만원을 만든 종들이 있었을 것이다.) 귀족은 다소를 불문하고 노력한 종들에게 같은 칭찬-- “잘 했다. 착한 종아 네가 가장 작은 일에 신실했다” 말하 고 노력의 결과대로 포상했다-- 1000만원 만든 종에게는 10배를 늘였다하여 10고을을 다스리는 권세, 500만원 만든 종에게는 5배를 늘였다하여 5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공정한 처사인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포상을 저울질 해서는 안된다. 포상은 어디까지나 베푸는 이의 권한이다. 현대의 포상은 주는 이들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받는 이들이 만들어 가지고 돌림떡을 만드는데 구경하기에도 민망하다.
세상은 점점 더 쇼화 하는것 같은데 모두 프로 레스링이 될가 염려된다. 내용은 어쨌든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현대의 사고방식은 진실에 사는 사람들에게 골치 거리이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무었이 다른가?
예수 마르다 마리아의 이야기가 잘 일러 주고 있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의 세상 생활을 가장 염려 없고 돌보아 드린 여인이다. 상냥하고 착하고 명철하고 봉사 희생적이다. 예수께서 집에 오시면 발 씻을 물에 갈아 입을 옷에 시장 끼를 끄실 음식에 쉬실 이부자리에 무엇하나에도 불편이 없게 섬긴다. 말 없이 일에만 몰두한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아주 다르다. 예수의 육체적 생활 편의 제공에 관심이 없고 예수의 말씀만 듣고 싶어하는 여인이다. 언니의 수고를 돕지 않고 예수의 옆에 붙어 앉아 이야기만 청하는 얼핏 보기에 염치없는 여인이다.
예수만 모시면 말이 많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말끝이 없다. 마르다도 예수의 옆에 앉아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 때문에 그리할 기회를 얻을 수가 없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너무 얄미워서 예수께 사정을 호소했다.
“주님 제 동생더러 저를 좀 도와 주라고 하십시오“ 예수는 엉뚱한 대담을 하셨다. “마르다야 네 수고가 큰데 마리아가 하는 일은 더 크다:”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인간의 일을 마리아는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다. 인간의 일도 중요하지마는 하나님의 일이 더 중하다는 것을 예수는 일깨워주셨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 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 하는구나”하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마가8:33)
하나님의 일은 영의 일이요 인간의 일은 육의 일임이 명백하다. 영의 일은 인간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일이다. 그리스도의 일은 진실에 사는 사람의 일이다.

진실에 사는 사람은 서로 아끼고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이해하고 사로 믿고 산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는 대중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요한6:29)”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이다.

인간 구원 믿음 사랑 -- 하나님의 일이며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것이 진실에 사는 것이다.

아버님께서 작곡 작사 하신 <하늘 가는 길>